[시론] 리우 올림픽 중계가 불편한 이유

[시론] 리우 올림픽 중계가 불편한 이유

[중앙일보] 입력 2016.08.22 00:40   수정 2016.08.22 00:57

졌다고 울먹이고 성차별 발언도

애국주의와 금메달 집착 지나쳐
이젠 결과와 과정 함께 즐길 때
국민 눈높이에 맞는 해설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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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효
서울대 체육철학 강사

‘스포츠는 스토리다’. 스포츠의 의미를 이처럼 적확하고 시원하게 전달하는 문장도 드물다. 4년 전 런던 올림픽 때 중앙일보가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적어도 스포츠에서 감동을 찾고자 하는 한 수정의 여지가 없다. 스포츠의 감동은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에서 비롯한다. 거기서 희로애락의 보편적 감정이 선수의 몸을 통해 날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이번 리우 올림픽은 이 감동의 양과 질이 예전 같지 않다. 금메달 개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시상대의 가장 높이 게양되는 태극기와 애국가가 불러오는 즉물적인 감정은 감동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스포츠의 감동은 경기의 전 과정에서 땀으로 범벅이 된 선수의 몸을 통해 전달된다. 긴장과 흥분, 안도와 불안, 자신감과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의 교차, 이런 미묘한 감정이 모두 선수의 움직임에 뒤엉켜 있다. 그래서 선수의 몸은 현존재를 드러내는 실존의 기호가 되며, 이런 까닭에 스포츠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올림픽 중계는 늘 이 이야기의 전달에 실패해 왔다. 대부분의 금메달은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고, 각성의 시청자들에게 주입된 것은 민족과 국가의 자긍심이었다. 하지만 올림픽을 통해 시청자가 느낄 수 있는 감동이 엄숙한 애국주의와 금메달 수의 자랑뿐이라면 불행하다. 금메달과 국민의 행복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스웨덴과 핀란드는 행복하지 않거나 애국심이 부족한 국가일 것이다. 오히려 이런 나라들이 더 편하게 올림픽을 즐길지 모른다. 국격이란 차분히 올림픽을 즐길 수 있는 정도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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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리우 올림픽이 불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상파의 애국주의 경쟁과 정제되지 못한 감정적 중계방송이 영 편치 못한 것은 혼자만의 생각일까. 온두라스와의 축구 8강전에서 모 방송국의 아나운서는 울먹이며 패배의 소식을 전하더니, 펜싱의 중계진은 경기와 무관한 여성 선수의 신체를 지적하는 성차별적인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오죽했으면 막말이 편집될 정도까지 이르렀을까.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해설가의 도를 넘은 감정이입이다. 선수의 실수를 지적하는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목소리와 승리를 재촉하는 내용 없는 해설은 열대야의 짜증을 한층 부채질했다. 리모컨을 쥐고 채널을 돌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잘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버티면 됩니다.” “아니죠. 물러나면 안 됩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제 정신력의 승부입니다. 조금 더 힘을 내줬으면 좋겠습니다.” 자동재생기처럼 반복되는 이런 멘트들은 해설이라기보다 차라리 응원에 가깝다.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후배이거나 제자이기도 한 선수의 플레이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인지상정인지 모른다. 때로 편파적이고 가족적인 해설은 애국의 감정을 고취하는 흥분제이기도 했다. 적어도 ‘빳데루 아저씨’의 시절은 그랬다.

그러나 어느새 국민은 그런 해설에 피곤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4년마다 모든 지상파가 메달 사냥의 현장을 충실하고 생생하게 전달한 덕분에 이제 국민도 효자 종목의 경기 형식과 전략, 심지어 선수의 당일 컨디션까지 파악하는 눈이 생겨 버렸다. 그래서 세계의 톱 레벨과의 거리와 탈락의 지점까지 짐작하는 감식안마저 갖게 되었다. 행운과 불운, 실력과 중과부적, 전략의 부재까지 분간할 줄 아는 국민에게 흥분과 장탄식으로 일관하는 시대착오적인 해설은 이제 사양하고 싶어진다.

스포츠와 현실의 경계는 명확하다. 스포츠는 다만 신체적 탁월성을 겨루는 문화의 한 장르일 뿐이다. 이런 구분이 흐릴수록 민족주의의 즉물적 자극이 준동한다. 올림픽은 인간의 신체적 능력의 다양함과 경이로움을 즐기는 인류의 축제다. 언제 우리가 우사인 볼트와 마이클 펠프스, 손연재와 박인비를 한꺼번에 볼 수 있겠는가. 그들이 펼치는 퍼포먼스는 인간의 신체가 빚어내는 아름다움의 정점이다. 해설가는 그 아름다움을 깨우쳐 주는 조언자에 불과하다. 감추어진 해당 종목의 매력을 설명해 경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해설가의 몫이다. 그래서 전문적인 지식과 풍부한 경험, 유려한 말솜씨가 갖춰져야 한다.

선진국일수록 이런 기준은 철저하다. 영국의 BBC가 미국의 마이클 존슨에게 육상의 해설을 맡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때로 해설가의 멘트가 방해로 작용하는 종목은 스포츠 전문 아나운서의 단독 진행으로 이뤄지는 경우도 있다. 그게 훨씬 경기의 몰입을 돕는다. 가까운 일본은 상업방송의 호들갑과 공영방송의 차분함으로 양극화돼 있지만 NHK의 해설은 객관적이고 차분하며 분석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의 해설은 시청자를 앞질러 가지 않는다. 그래야 편안히 경기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편안하게 올림픽을 즐기자. 금메달을 따지 못했어도 소치의 김연아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해설가의 멘트가 거슬리면 ‘음소거’를 누르고 김연아를 보듯 세계적 스포츠 축제의 퍼포먼스를 감상하자. 어깨의 힘을 빼고.

김정효 서울대 체육철학 강사

[삶의 향기] 수사의 힘

[삶의 향기] 수사의 힘


나이·권력 아닌 논리력·설득력 우선인 사회가 건강
설득을 가르치는 나라, 말이 통하는 사회가 돼야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

최근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미셸 오바마가 한 연설이 화제가 되고 있다. “저는 매일 아침 노예들에 의해 세워진 집에서 잠을 깹니다. 그리고 제 딸들, 두 명의 아름답고 지적인 흑인 여성들이 백악관의 잔디밭에서 강아지들과 노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녀는 단 두 문장으로 흑인 노예의 역사를 상기시키고 있으며, 인종차별의 부당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그런 노예의 후예가 대통령이 되는 미국의 저력을 자랑하고 있다.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자리가 이런 수사(修辭)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런 감동적인 수사의 이면에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자유로운 토론을 중시하고 설득의 수사학을 연마해 온 교육과 문화의 유구한 전통이 있는 것이다. 수사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그것은 “설득의 가용(可用)한 수단”(아리스토텔레스)이다. 모든 관계에 언어가 개입된다. 생각과 사상과 느낌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언어의 외피를 입을 때 비로소 존재 안으로 들어온다. 막말로 언어 없이 사상도 없으며, 표현할 수 없는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이다.

수사가 빈약하거나 부실한 공동체에서 쓸데없거나 소모적인 분쟁이 일어난다. 얼마 전 정부의 한 고위 관리자가 민중을 “개·돼지”라고 불러서 큰 소요가 일어났다. 최근에는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문제와 관련해 “외부세력”이라는 불분명한 용어가 혼란을 일으킨다. 어떤 사람들은 성주 주민이 아니면 다 외부세력이라고 몰아붙인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놀랍게도 미국을 외부세력이라고 지칭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외부세력의 기준은 공간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외부세력은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세력’을 의미하는가. 그렇지도 않다. 수많은 성주 거주민들이 사드 배치를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넌더리가 나는 “종북”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이 단어는 말 그대로 ‘북한을 추종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수많은 발화자에 의해 이 단어는 자신들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 혹은 세력을 지칭해 왔다. 이 언어의 폭력에 의해 때로 멀쩡한 사람들이 종북이 되고, 이 나라는 각계각층에 북한을 옹호하고 모방하려는 사람들로 ‘득실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언어가 현실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먼저 사물이 있고 그것을 지칭하는 언어가 있다는 구태의연한 언어관을 의심해봐야 한다. 언어는 언어 이전의 사물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거꾸로 현실을 만들기도 한다. 공동체 안에서 어떤 한 구성원이 다른 사람을 지칭한 “저 사람은 너무 이기적이야”라는 말 한마디가 실제(fact)와 무관하게 한 사람을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이것이 언어의 힘이고 수사의 힘이다.

공동체의 모든 관계에 이 언어의 끈들이 개입된다. 언어 없이 관계도 없고 현실도 없다. 그러니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진술하고 설득하는 수사의 힘은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국가 단위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서툴고 악의적인 서사는 공동체의 귀중한 에너지를 쓸데없는 곳에 낭비시킨다. 글쓰기가 아닌 암기 위주의 교육이 수사 부재의 공동체를 만든다. 수사가 빈약하므로 설득의 기술이 부족하고, 설득하지 못하므로 언어 외적인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능사인 사회가 된다.

좋은 수사는 또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평등하고 민주적인 것으로 만든다. 나이나 권력이 아니라 논리력과 합리적 설득력이 우선인 사회는 얼마나 건강한가. 그런 사회에는 논리 정연한 자식의 말을 받아들일 줄 아는 부모가 많으며 학생의 주장에 귀 기울이는 선생들이 넘쳐난다. 그런 사회의 정치는 힘으로 국민들을 몰아붙이지 않는다. ‘말이 되지 않는’ 정책은 이미 옳은 정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득력과 그것에 토대한 사회적 동의를 중시할 때 사회는 비로소 합리·평등·민주의 원칙에 의해 가동된다. 이렇게 ‘계급장’ 뗀 담론의 “공공영역(public sphere)”(하버마스)이 확대될 때 ‘나쁜’ 사상에 대한 공포도 사라진다. 그런 사상은 설득력이 부족하므로 사회적 동의를 이끌어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설득을 가르치는 나라, 말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출처: 중앙일보] [삶의 향기] 수사의 힘

재미도 의미도 없는 지옥을 팔 수 있나?

[중앙시평] 재미도 의미도 없는 지옥을 팔 수 있나? 

[출처: 중앙일보] [중앙시평] 재미도 의미도 없는 지옥을 팔 수 있나?

소통의 거리

[이훈범의 생각지도] 25m와 500m

                 물리적인 거리가 소통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한 학자가 있다. 미국 MIT 경영대학원의 토머스 앨런 교수다. 그의 연구팀은 7개 연구소의 구성원 512명이 수개월 동안 조직 내 어떤 동료들과 상호작용했는지 조사했다. 결론은 싱거웠다. 두 사람의 소통 가능성은 그들의 물리적 거리와 강한 반비례 관계였다. 당연한 거였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대략 25m의 거리에서 소통의 가능성이 ‘0’에 근접한 것이다. 한 건물 같은 층에서 근무해도 고작 25m만 벗어나면 거의 소통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이 연구가 e메일 등장 이전에 행해진 것이라고 그 의미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요즘 같은 모바일 시대에도 같은 층에서 근무하는 동료를 몇 달 만에야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경험이 흔치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라도 한 번 만나면 문자를 열 번 주고받은 것보다 많은 정보를 교환할 수 있다. 동료의 표정, 옷차림, 행동거지만으로도 그동안 벌어진 수많은 사실들을 유추할 수 있는 까닭이다. 직접 대면이라는 다채널 의사소통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물리적인 거리와 소통 간의 반비례 관계를 정면 부인하는 이도 있다. 이재만 대통령총무비서관이다. 그는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본관과 비서들이 근무하는 위민관의 거리가 25m의 스무 배인 500m나 되는데도 “대통령과 보좌진 간 소통은 문제가 없다”고 자신했다. 참모들이 면담 신청을 한 뒤 걸어서 10분 이상, 차를 타도 몇 분 걸리는 본관에 도착해 검문소를 통과하고 계단을 올라 2층 긴 복도를 지난 뒤 위압적인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서면 하려던 말도 다 까먹을 지경인데 말이다. 재배치 설계용역 비용을 내년 예산에 반영해주겠다던 국회 운영위 여야 의원들만 머쓱해졌다.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청와대가 불통의 현장임을 인정하기 싫었을 터다. 하지만 국민들 근심은 어쩔 건가. 대등한 관계일 때 25m다. 상하관계일 때는 정서적 거리가 훨씬 멀다. 최고권력자와의 거리라면 수십 배 이상 늘어날 수도 있다. 흔히 청와대의 개선 모델로 백악관을 들지만 백악관도 마찬가지다. 건물보다 사람이 더 문제다.

 1986년부터 백악관을 출입한 유에스앤드월드리포트 기자 케네스 월시가 간파한 게 그거다. 그의 책 『백악관의 죄수들: 미국 대통령들의 고립과 리더십 위기』는 존슨, 카터, 닉슨, 아들 부시 같은 많은 미국 대통령들이 백악관에 갇혀 민심과 괴리되는 순간들을 짚어냈다. 특히 내성적이던 닉슨은 백악관에서 밥도 혼자 먹으며 실세 비서실장 밥 핼드먼의 입을 민심의 통로로 이용하다 실패한 대통령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오바마 같은 사람은 백악관의 짧은 동선을 충분히 이용하는 대통령이다. 예고 없이 불쑥 기자실을 찾아 신임 대변인들을 소개하며 여론의 첨병들과 소통한다.

 내가 볼 때 우리 대통령은 오바마보다는 닉슨에 가까운 성격이다. 아니 대통령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렇다. 박근혜 대통령이 인수위 시절까지 청와대 공간 재배치에 긍정적이었다가 그 고독한 군주적 위엄에 파묻혔듯 차기, 차차기 대통령도 그럴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사람이 같다면 건물이라도 바뀌어야 한다.

 그러니까 박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줬으면 좋겠다. 본인이 아니라 다음 대통령을 위해서, 그리고 대한민국을 위해서 말이다. 간단한 문제다. 야당까지 협조하겠다는데 어려울 게 없다. 대통령만 마음먹으면 이 비서관의 생각 따위는 절로 바뀐다. 효율적이지도 않고 권위주의적이기만 하며 심지어 멋있지도 않은 본관을 보다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건물로 바꿀 수 있다.

 비서들은 다 본관으로 들어가 대통령과 매시간 부대끼며 국정을 논하고 미래를 토론해야 한다. 40년 넘어 무너질 위험인 위민관도 새로 지어 세종시에 있는 장관들의 서울 출장소로 만들어도 좋겠다. 여전히 25m 한계에는 못 미치지만 KTX 속도로 대통령 곁에 달려왔지 않느냐 말이다.

이훈범 논설위원

[출처: 중앙일보] [이훈범의 생각지도] 25m와 500m

라제시 찬디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 “핵심 고객 재정의가 혁신의 기본”

 입력 : 2016.01.31 11:20
라제시 찬디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 “핵심 고객 재정의가 혁신의 기본”
 라제시 찬디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
한때 세계 1위 사진 필름 회사였던 코닥은 필름을 사용하지 않는 디지털 물결 속에 무너졌다. 1975년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 기술을 개발하고도 말이다. 디지털 카메라 시대를 연 회사가 디지털 카메라 때문에 망했다. 여기까지는 많이 알려진 얘기다.라제시 찬디(Chandy·47)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는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고 말한다. “흔히 코닥이 디지털 시대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정상에서 추락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코닥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회사의 핵심 고객을 잘못 정의했기 때문입니다. 코닥이 생각한 주 고객은 디지털 사진을 찍을 개인이 아니라,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는 사진 현상소였습니다. 현상소들은 코닥이 디지털과 관련된 뭔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큰돈 들여 기계를 샀는데 누구 사업 말아먹게 할 일 있냐’며 반발했습니다. 코닥은 주력해야 하는 고객군이 달라졌다는 것을 빨리 깨닫고 개인용 디지털 카메라를 팔아야 했습니다. 핵심 고객을 재(再)정의하지 않고 기존 시장에 안주한 게 코닥의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찬디 교수는 2013년 ‘최고의 경영 사상가 50인(Thinkers 50)’에 이름을 올린 경영 이론가다. 기업 혁신, 마케팅, 기업가 정신 등을 주로 연구했으며, 3M, 마이크로소프트, 필립스, 도이체텔레콤 등 글로벌 기업에서 혁신 전략에 대해 강의해왔다. 2006~2008년에는 미국 상무부 산하 혁신평가자문위원회에서 미국 경제의 혁신 수준을 평가하는 작업을 맡았다.찬디 교수는 “내 고객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혁신의 기본”이라고 말한다. 기업은 사업 환경 변화에 따라 회사가 집중해야 하는 핵심 고객이 달라지지 않았는지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핵심 고객을 끊임없이 재정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달 런던비즈니스스쿨 연구실에서 찬디 교수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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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고객 재정의가 혁신의 기본은행이 돈 안되는 대상으로 볼때엠페사는 빈곤층도 거대한 소비층으로 정의해 성공코닥이 망한 것은개인을 핵심 고객으로 못 보고사진 현상소만 바라본 게 실수
―핵심 고객을 재정의하는 것을 혁신의 중점으로 보셨습니다.”한국에서 저에게 돈을 보낸다고 합시다. 보통 어떻게 하나요? 우선 은행을 통해야 할 겁니다. 인터넷 뱅킹이든 모바일 뱅킹이든 은행 계좌가 있어야 하죠. 아프리카 케냐에는 ‘엠페사(M-Pesa)’라는 모바일 머니 서비스가 있습니다. 휴대전화로 돈을 주고받는 서비스입니다. 은행 계좌는 필요 없습니다. 휴대전화 번호를 이용해 간단히 상대방에게 돈을 보낼 수 있습니다. 2007년 서비스 출시 이후 현재 케냐 성인 인구의 절반 이상이 엠페사를 쓰고 있죠. 보통 인터넷 송금 서비스는 은행을 고객으로 생각해 이들과 제휴하려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엠페사를 출시한 케냐 통신사 사파리콤과 영국 보다폰은 엠페사의 고객을 케냐 국민 전체로 정의했습니다. 사실상 대다수 케냐 국민이 은행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케냐인들은 돈을 집 안에 보관하고 다른 지역에 송금할 때는 버스 운전사에게 부탁하곤 했습니다. 사파리콤과 보다폰은 기본적 금융 서비스에 접근할 수 없었던 케냐 국민의 절실함을 꿰뚫어봤습니다. 당시 케냐의 은행은 이들을 ‘금융 소비자’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돈이 안 되는 가난한 사람들로만 봤죠.”―그렇다면 빈곤층이 주 고객이란 얘긴데 수익은 나나요?”빈곤 국가라고 해서 기부나 원조 대상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빈곤층에 속한 개인은 가난한 사람들이지만, 전체로 보면 거대한 소비자층이 됩니다. 엠페사 서비스는 2009년 손익분기점을 넘겼고 작년엔 매출을 약 3800억원 올렸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서비스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엠페사는 은행이라는 기존 틀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냈습니다.”―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던 빈곤층을 주력 고객으로 재정의해 혁신에 성공한 것이군요.”그렇습니다. 혁신(innovation)은 발명(invention)과 다릅니다. 발명은 세상에 없던 새로운 아이디어를 탄생시키는 것이고 혁신은 새 아이디어를 소비자의 생활 깊숙이 침투시키는 것입니다. 흔히 혁신이라고 하면 새로운 것, 새로운 방식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동시에 상업화까지 이뤄져야 혁신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사파리콤과 보다폰은 모바일 송금이란 새 아이디어와 기술을 활용해 은행을 대상으로 돈을 벌려 하지 않았습니다. 은행을 이용할 수 없던 사람 모두를 고객으로 삼았습니다.”―고객을 재정의하려면 고객이 바뀌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를 찾아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을까요?.”경영자가 새 아이디어에 개방적인 태도를 갖고 세상의 변화에 민감해야 합니다. 소비자와 산업의 빠른 변화 속도에 뒤처지면 안 됩니다. 경영자 스스로가 모든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어느 곳을 보고, 누구에게 어떤 조언을 받을지를 알면 됩니다. 인내심도 있어야 합니다. 급진적인 아이디어는 개발·출시까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4D 카메라를 개발했더라도 소비자가 당장 원하지 않고 기꺼이 돈을 내려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것으로 눈을 돌리고 싶은 유혹에 빠지죠. 투자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스스로도 진전이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게 되니까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변화는 계속 일어납니다. 혁신은 흥분, 공포 등이 모두 나타나는 긴 과정입니다. 시장이 준비될 때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기존 사업이 잘될수록 고객이 재정의되는 변화에 무뎌지고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그런 우(愚)를 범하지 않으려면 항상 미래를 생각해야 합니다. 회사가 잘나갈수록 오만함을 멀리해야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는 데 신경 쓰기보다는 늘 그다음을 생각해야 하죠. 지금 잘 팔리는 제품보다는 앞으로 어떤 걸 팔아야 할지를 얘기하는 겁니다. 미래 소비자는 어떨지, 지금과 어떻게 다를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애플의 음악 파일 플레이어 ‘아이팟’은 출시 후 바로 인기를 끌지는 못했습니다. 시장을 평정하는 데 몇 년이 걸렸죠. 아이팟은 한때 애플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지만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췄습니다. 누가 퇴출시켰을까요? 바로 애플 스스로입니다. 애플은 기존 제품 잠식을 마다하지 않고 아이폰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키웠습니다. 아이팟의 목적인 음악 듣기 기능은 아이폰에 흡수됐습니다. 아이폰 고객은 아이팟 시장의 고객보다 훨씬 다양하고 광범위합니다. 현재의 비즈니스 모델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어도 새로운 사업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이제 케냐에서는 엠페사 모바일 머니 서비스를 이용해 휴대전화로 돈을 주고받는 것이 일상이 됐다. / 블룸버그
-지키기보다 미래를 생각하라’아이팟’ 퇴출시킨 건 애플 자신잘 나가던 상품 대신아이폰으로 광범위한 고객 잡아1980년대 컴퓨터 제조사 DEC는”집에서 누가 컴퓨터 쓰겠나”개인 고객 공략 실패
―핵심 고객 재정의에 성공한 회사보다는 실패한 회사가 더 많을 것 같습니다.”그래서 리더 역할이 중요합니다. 변화를 포착하지 못하고 혁신을 묵살해 회사의 미래를 망친 경영자가 다수입니다. 1980년대 DEC(디지털 이큅먼트 코퍼레이션)는 컴퓨터 제조업체로 이름을 날렸지만 그 후 사세가 기울어 1998년 컴팩에 팔렸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당시 컴퓨터 산업은 개인용 컴퓨터(PC)로 시장 중심이 빠르게 옮아가고 있었습니다. 회사가 공략해야 할 핵심 고객도 바뀌고 있었다는 뜻이죠. 그러나 켄 올슨 DEC 최고경영자(CEO)는 이를 무시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집에서 컴퓨터를 쓰고 싶어 할 이유가 없다’고 단언했죠. 그는 회사에서 직원들이 PC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습니다.”찬디 교수는 동료 학자들과 함께 회사의 혁신에 CEO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했다. 성공적 변신을 이끄는 CEO와 그러지 못하는 CEO는 뭐가 다를까? 그는 “평소에 얼마나 미래를 생각하는지가 큰 차이를 만든다”고 말한다.”CEO는 회사 방향을 정하고 이끌어가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흔히 CEO가 앞날을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낼 거란 인식이 있죠. 그러나 연구 결과 실제로 CEO가 장기 전략에 집중하며 보내는 시간은 아주 적었습니다. 임원들에게 CEO가 미래 고객과 경쟁자, 유망 기술에 얼마나 신경 쓰는지만 물어봐도 CEO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앞날을 생각하는 CEO의 말에서는 ‘미래, 예상, ~하겠다’ 같은 미래형 단어가 자주 들립니다. CEO가 과거 어떤 부서에서 근무했는지도 미래를 생각하는 정도에 영향을 줬습니다. 회계 등 지나간 일을 더 들여다보는 부서보다는 마케팅이나 연구개발(R&D) 부서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CEO가 앞일을 계획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평소에 미래를 생각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쓰는지를 확인해보세요. 생각보다 적을 겁니다. 매일 처리해야 할 일이 쌓여있더라도 늘 미래를 생각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무시하고 결국 회사를 몰락의 길로 몰아갈 수도 있습니다. 일부러라도 생각할 시간을 만드세요. 빌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를 경영할 당시 1년에 두 번 ‘생각하는 주’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숲 속 오두막에 틀어박혀 회사의 미래 전략을 구상했죠.”―단순히 생각하는 것만으로 족하지는 않을 텐데, 어디에 중점을 둬야 할까요.”소비자에게 필요한 것을 간파하고 한발 더 나아가 앞으로 소비자가 원하게 될 것을 눈앞에 가져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전기차 제조업체 테슬라는 고급차 소비자 중 환경 보호를 중시하는 소비자의 욕구를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테슬라는 서비스 센터 바닥을 과감하게 흰색으로 꾸몄습니다. 전기차는 바닥에 기름이나 이물질이 새는 일이 없다는 걸 은연중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기존 딜러망도 없앴습니다. 테슬라의 ‘모델 S’ 전기차는 온라인으로 주문을 받은 후 제작됩니다. 테슬라는 소비자가 물건을 살 때 온라인 검색부터 해보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직접 차를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쇼핑몰에 임시 전시장을 설치하죠. 이곳 직원은 테슬라 전문가이긴 해도 차를 팔지는 못합니다. 이전과 다른 생태계를 창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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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내일은 어제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중앙시평] 내일은 어제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본문
[중앙시평] 내일은 어제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중앙일보 | 허태균  | 입력 2016.01.18. 01:10 | 수정 2016.01.18. 07:28 

1월 중순쯤이면 모두들 2016년을 위한 새로운 계획을 이미 세웠을 것이다. 책을 몇 권 읽겠다는 사소하고 개인적인 목표, 매출을 높이거나 물가를 잡겠다는 심각하고 거시적 과제들까지. 그런데 흔히 이런 계획들은 지난해를 기준으로 또는 지난해의 실패나 문제를 고치기 위해 세워지기도 한다. ‘지난해에는 책을 7권밖에 못 읽었는데 올해는 꼭…’ ‘지난해 매출 대비 얼마’ ‘지난해에는 부동산 문제가 있었으니 올해는…’ 등의 생각에서 그 계획들이 나온다. 이런 사고는 그 계획들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매우 시의적절하고 당면한 문제를 직접 다루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그 계획의 필요성과 타당성이 자동적으로 부여된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사고는 우리를 결국 초점주의(focalism)에 빠지게 만들고, 드러난 몇 가지 과거의 문제에 우리의 미래를 종속되게 만드는 것이다.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이런 초점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2015년 말 한국의 대학교육을 완전히 혼란의 정점으로 끌고 간 시간강사법이다. 결국(다행히도?) 또다시 유예되기는 했지만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시간강사법은 그 이전부터 문제가 되어 온 대학 시간강사의 처우개선과 신분보장 등의 이슈가 한 시간강사의 자살을 계기로 사회적 이슈화되면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런 비극적 사건 직후에 만들어져 오히려 철저히 초점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한 해에 한두 과목 강의만 하면서 최저생계비에 턱도 없는 수입으로 살아야 하고, 한 학기 단위로 강의가 결정되어 삶이 불안하고, 학교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공정한 공개채용 방식, 한 학기 9시간 이상, 1년 단위 계약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시간강사법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어찌 보면 과거의 문제들을 꼭꼭 집어서 해결하는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해결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부 인기 있는 전공들을 제외하고는 개설과목에 비해 시간강사를 하고 싶어 하는 고학력 실업자의 수가 너무나도 많다는 더 현실적이고 중요한 본질을 완전히 무시했다. 현재 많은 경우 소수의 과목을 제자나 주변의 강사들에게 나누어, 심지어 학기별로 돌아가면서 주고 있다. 그 한 과목이 부족하다는 걸 알지만 누구 한 명에게 몰아서 주기엔 오히려 주변에 너무 딱한 강사가 많다. 그런데 이 법이 시행되면 대학이 구조조정이라는 꼼수를 안 부리고 지금 강사들이 맡는 과목을 그대로 유지해도, 단순히 산술적으로 1년에 3학점짜리 한 과목을 나누어 강의하던 6명의 강사 중 한 명이 그 6개 강의를 독식하게 된다. 그럼 나머지 5명은 어떻게 될까? 소수에게 몰아주고 나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은 더 열악한 상황에 빠지는 모순은 어쩔 건가. 아마 이 법이 시행되고 나면 시간강사의 처우가 개선된 듯한 착시 자료도 만들어질 것이다. 시간강사를 하는 소수만을 대상으로 한 자료가 될 테니.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시간강사마저 공개채용 방식으로 만들면 국내 대학 출신 석·박사들은 어떻게 될까? 한국 대학교육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스스로 배출해낸 석·박사 출신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최근 대학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영어강의 능력, 해외활동과 논문 실적을 강화하면서 국내 석·박사들이 설 자리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국내 석·박사들은 전임교원이 되기도 힘들고, 상대적으로 상당한 시간을 시간강사로 보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제 그 시간강사 자리도 전임교원과 같은 매력적인 자리로 만들어 놓고 전임교원 채용과 같은 절차로 해외 석·박사 출신들과 경쟁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학과 학과의 평가에 그 시간강사들의 업적도 포함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은가?
 이런 법안이나 정책들은 결코 사태를 더 악화시키려고 일부러 만들었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과거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었다. 하지만 딱 그 문제만 보고 만들었다. 이게 바로 초점주의다. 수많은 관련된 사항을 다 무시하고, 한두 정보에만 집중해 사고하고 판단하는 비극적 현상이다. 강사 문제를 포함한 한국의 대학교육을 궁극적으로 어떻게 만들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그 정책과 법안이 가져올 미래를 상상(simulation)해 보지 않은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기 위해 과거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필수적이다. 하지만 과거는 미래에 대한 고민의 시작일 뿐이다. 원하는 더 나은 미래의 모습을 상상해 보고 그 모습을 달성하기 위한 하루, 한 달, 한 해를 살다 보면 과거의 문제가 해결되어 있는 것이지 과거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꼭 미래가 밝아지지 않는다. 새해의 계획을 다시 들여다보자. 혹시 어제를 위해 내일을 살겠다고 하고 있지 않은지.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여러분 인생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삶의 향기] 여러분 인생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중앙일보] 입력 2015.03.17 00:03 / 수정 2015.03.17 00:05

신예리 JTBC 국제부장 밤샘토론 앵커
 
내가 알아야 할 거의 모든 것을 아빠에게 배웠다. 술만 드시면 2차로 손님들을 집에 몰고 오는 아빠 덕에 ‘홍동백서(紅東白西)’보다 술상 차리는 법을 먼저 깨쳤다. 오후 9시면 꿈나라행인 엄마 대신 고사리손으로 사과를 토끼 모양으로 깎고, 사각형 치즈는 삼각형 8개로 잘라 얌전히 담아내곤 했다. 첫 술잔을 입에 댄 것도 아빠 앞이었음은 물으나마나다.

 어디 술뿐일까. 시골에서 나고 자라 나무 박사, 꽃 박사인 아빠를 둔 덕분에 “호박꽃도 꽃이냐”는 말로 구박받는 호박꽃이 실은 담박하니 예쁘단 걸 안다. 애기똥풀꽃·며느리밥풀꽃·홀아비바람꽃… 사연처럼 애잔한 들꽃들의 이름을 불러 줄 수 있게 됐다. 1980년대 미팅 자리의 단골 질문이던 “좋아하는 꽃이 뭐예요?”에도 주저 없이 “패랭이꽃!”을 외쳐 남자들 진땀깨나 흘리게 했던 나다.

 요즘은 ‘성교육’으로 대체된 이른바 ‘순결교육’을 시켜 준 것도 아빠다. 갓 중학생이 된 딸에게 무슨 영화 속 대사라며 넌지시 ‘손수건론’을 들려주셨다. 깨끗이 빤 새 손수건은 땀도 조심조심 닦지만 한 번 땀을 닦으면 코도 풀게 되고, 이왕 코까지 푼 뒤엔 구두도 쉬이 문지를 수 있다는 거였다. 어린 마음에도 “절대 코 푼 손수건 신세가 되진 않겠다”며 ‘정조 관념’을 확실히 다잡았던 기억이 난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은 아빠지만 돌이켜 보면 내가 이만큼 사람 구실하기까지 이끌어 준 분들이 한둘이 아니다.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귀인’들이 나타나 천둥벌거숭이 같던 나를 갈고 깎고 다듬어 주셨다. 요컨대 그분들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경험이 쌓이고 쌓인 결정체가 현재의 나인 셈이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내가 퍽 대단한 사람인 듯 느껴지는데 물론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낳자마자 걷고 뛰는 다른 짐승들과 달리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는 미약한 존재로 세상에 온 우리. 이런 우릴 온전한 사람 꼴 나게 만들어 준 이들의 노고를 잊지 말자는 얘기다.

 학교 때 은사들만 해도 그렇다. 학창 시절이라 하면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은 일만 떠오른다는 게 남자 동료들의 볼멘소리다. 하지만 한 번 곰곰 생각해 보시라. ‘미친개’‘불곰’이라 불리던 악명 높은 학생 주임들도 분명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씀 한두 마디 안 하셨을 리 없다. 독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약이 되는 가르침도 분명 있었을 터다.

 학원도 과외도 금지된 군부 독재 시절, 내게 영어의 세계를 처음 열어 주신 중학교 1학년 때 영어선생님만 해도 그랬다. 원어민 수준은커녕 ‘억수로’ 진한 경상도 억양의 소유자인 선생님은 ‘아이 엠 톰(I am Tom, 나는 톰이야)’ ‘유 아 제인(You are Jane, 너는 제인이지)’으로 시작되는 교과서를 다짜고짜 달달 외우게 하셨다. 이런 무식한 학습법이 있느냐며 툴툴댔지만 그렇게 웅얼웅얼하다 영어랑 친해졌고, 친해진 김에 대학도 영문과에 들어갔고, 지금도 주로 영어로 된 국제 뉴스를 다루는 일을 맡고 있으니 내겐 먹고살 길을 열어 주신 은인이 아닌가.

 직장 상사도 마찬가지다. 『미생』의 오 과장과 김 대리뿐 아니라 밉살스러운 마 부장도 스승이 될 수 있단 얘기다. 기자 초년병 시절, 밥 한 공기를 다 비운 내게 “무슨 여자가 부끄럼도 없이 밥을 그리 많이 먹느냐?”고 타박하던 모 부장. 울컥하는 마음에 “아줌마, 여기 공깃밥 하나 더 추가요”를 외친 뒤 꾸역꾸역 그 밥마저 다 먹어 치웠다. 그걸론 분이 덜 풀려 밥 많이 먹는 여자가 일도 더 잘한다는 걸 보여 주려고 기를 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여성의 취업과 승진을 가로막는 이른바 ‘유리천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단단하다는 한국에서 26년째 한 직장을 무탈하게 다니는 비결이 뭐겠나. 다 그때 품은 오기 덕분이라 여긴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그중에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더니 과연 그렇다. 공자님이 어디 괜한 말씀 하실 분인가. 지금 당신을 많이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덕분에 인격 수양 잘하고 있다”며 외려 고마워할 일이다. 내친김에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르쳐 준 모든 분께 감사 인사를 전한다. 당신 덕분에 지금 내가 여기 있노라고.

신예리 JTBC 국제부장·밤샘토론 앵커

호감이 세상을 움직인다(매력적인 사람)

[중앙시평] 호감이 세상을 움직인다

[중앙일보] 입력 2014.04.05 00:01 / 수정 2014.04.05
00:04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우리는 측정할 수
있는 것을 과대평가하고, 측정할 수 없는 것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전 최고마케팅 경영자 존 헤이스가 한 말이다.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숫자부터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측정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까.

 무엇이 세상을 움직이는가? 의사결정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이해득실,
가치와 능력, 판단과 실행 다 중요하지만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것 중 하나가 사람들의 ‘매력’이라는 요소다. 우리는 호감 가는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고, 매력적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개인이 풍기는
매력이다.

 측정하기 곤란한 이 ‘매력’이란 것은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힌 상황에서도 여지없이 작용한다. 조지타운대 경영대학원 로히트
바르가바 교수는 2012년 자신이 쓴 저서 『호감이 전략을 이긴다』(원더박스, 2013)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 통화는 종이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관계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세계 경제가 얼핏 숫자들에 의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호감이 매우 강력한 기제로
작용한다는 얘기다. ‘비슷한 능력이라면 이왕이면 호감 가는 사람과 일하려고 한다’가 아니라 호감이 능력보다 더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2005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 티지아나 카시아로와 듀크대 미겔 수자 로보 교수의 연구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들은
호감도가 비즈니스 영역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보는 설문조사를 했다. 실리콘밸리 테크회사, 미국의 대학교, 스페인의 세계적인 명품회사 직원들을
대상으로 호감도와 능력에 대한 선호 조사를 했다. 같은 직장에서 근무한다고 가정할 경우 어떤 동료와 함께 일하고 싶은지 물은
것이다.

 당연히 능력도 뛰어나고 호감도도 높은 사람과 일하길 다들 희망했다. 능력이 없는 데다가 호감도까지 낮은 사람과 일하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흥미로운 결과는 호감도는 높으나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과 업무능력은 뛰어나지만 호감도가 낮은 사람 중에서 선택해야 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은 전자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유능한 밉상보다 매력적인 바보를 선택한 것이다. 호감도와 능력 중에서 호감도를 더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맬컴 글래드웰의 『블링크』에 따르면, 의사가 의료 과실로 소송을 당할 가능성은
얼마나 많은 실수를 했느냐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고 한다. 부적절한 치료로 인해 의사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환자가 소송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의료사고 전문변호사 앨리스 버킨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의사를 상대로는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의료과실을 범한
의사를 고소하라는 주위의 압력을 받을 때 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그 의사가 한 실수는 개의치 않습니다. 난 그 의사를 좋아하거든요.
고소할 마음이 없습니다.”

 토론토대 웬디 레빈슨 박사는 한번도 소송을 당한 적이 없는 의사들은 그렇지 않은 의사들보다 환자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소송을 당한 적이 없는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더 잘 웃고, 더 적극적으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우선 이렇게 해 보고 다음에는 말씀하신 대로 해봅시다” 같은 말을 통해 환자들의 의견을 반영하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을 신뢰하고 믿는다. 좋아하는 것과 믿을 만한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인데도 말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원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능력이 있다는 보장이 없음에도 말이다. 왜냐하면 비호감인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은 지옥을 경험하는 것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비즈니스 세계에선 관계가 중요하니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두루 처세를 잘하라는 식의 조언을 하려는 게 아니다. 호감을 풍기기 위해 실천해야 할
지침들을 외울 필요도 없다.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애써 외면해 온 호감이라는 걸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것의 역할과 효과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룰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고객들에게 호감을 전하며 물건을 팔고 있는지, 우리 회사 직원들의 호감도는 어느 정도인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회심리학자 팀 샌더스는 얼마나 진실한가, 얼마나 이타적인가, 공감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가, 남의 말을 들어주고 배려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가 등이 호감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호감은 소통과 배려의 결과물인 것이다.

 

 호감 가는 인간으로 어릴 때부터 교육해야 한다. 매력은 인간이 갖추어야 할 가장 강력한
미덕이다. 함께 더불어 살기에 매력적인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행복한 사회를 위해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다.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