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요즘 40대 이상의 학부모들의 고민- 차라리 전두환 시절이 낫다고?

[서소문 포럼] 차라리 전두환 시절이 낫다고?

[중앙일보] 입력 2012.08.17 00:47 / 수정 2012.08.17 00:47

강홍준 논설위원

 

중·고생을 둔 학부모라면 미욱한 자식을 보며 하루에도 참을 인(忍)자 세 번을 마음에 쓴다. 생각해 보면 성질이 날 만하다. “나는 그래도 번듯한 대학 나와 남에게 꿇리지 않고 이렇게 버티며 살고 있는데 넌 도대체 뭐냐”고 묻고 싶기도 하겠다. 가장 허탈한 땐 과외다 뭐다 돈을 쏟아붓고 있는데도 올라갈 줄 모르는 아이의 성적표를 받아볼 때 아닐까.

 요즘 40대 이상의 학부모들 사이에 과외 금지·학력고사로 대표되는 ‘전두환 시대’를 희구하는 심리가 있는 건 이런 배경에서다. “차라리 그때가 낫다”는 말은 그냥 웃자고 하는 얘기 수준은 아닌 것 같다. 보수 신문 칼럼조차 대권 후보들은 전두환에게 한 수 배우라며 그 시대의 단순 무식함을 조언하기도 한다.

 1980년 하루 아침에 학원 수강과 과외가 금지됐고, 대학은 본고사 또는 학력고사, 내신으로 단순하게 선발했다. 지금처럼 복잡한 3000여 개 대입 전형은 그때 분명 없었다. 머리 좋은 애들은 부모 도움 없어도 SKY(서울대·연세대·고려대) 대학에 척척 붙기도 했다. 그러니 당시 좀 괜찮다는 대학 나온 부모들은 그 시대가 그리울 것이다. 어떨 때는 “나는 되는데, 내 몸에서 나온 아이는 왜 안 되는데”라며 누군가를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어질 것이다.

 이런 단순 무식함은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가능하지 않으며, 전두환 시절을 그리워하는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부모인 나는 SKY 갔는데 자식은 왜 안 되는지 답을 알고 싶다면 과거 학창시절을 떠올려 보기 바란다. 그때 고교 교사는 한 학급 60명 중에 몇 명을 데리고 수업을 했었나. 공부는 아예 포기하고 잠 자는 아이가 절반을 넘었다. 지금은 어떤가. 학습 부진아도 학원은 다 간다.

 

 지금부터 12년 전인 2000학년도만 하더라도 서울대 정원이 4959명이었고, 지금보다 1609명 많았다. 고려대·연세대도 마찬가지다. 세월이 갈수록 들어가는 문은 좁아지고, 들어가려는 사람은 더 몰리니 지금 아이들은 과거 부모 때보다 상상도 못할 정도로 피 말리는 경쟁 속에 놓여 있는 게 분명하다. 명문대 간판 단 부모를 매일 봐야 하는 아이들의 심정이야 오죽할까.

 경쟁이 치열하면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사교육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남보다 앞서겠다는 욕망,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경쟁적 상황이 단칼에 해결될 수 있을까. 부모가 그 시절을 희구한다면 “자, 이제 부모들은 사교육 몰빵 그만하고, 아이들끼리 실력으로 경쟁하게 합시다”라는 사회적 합의까지 이끌어내야 한다. 내 힘으로 안 되니 제2의 전두환이라도 나와서 아이가 처한 경쟁적 상황까지 치워달라는 간절한 바람인가. 한마디로 고통 속에 잠들다 꾸게 된 꿈에 불과하다.

 대입 경쟁은 전두환 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4년제 대학에서 6년 이상 다니며 벌어지는 스펙·학점 경쟁, 졸업을 앞두고 취업 경쟁까지도 그분이 해결해줘야 하나.

 그러므로 생각이 있는 부모라면 오히려 이제라도 자식에 대해 두 가지 관점에서 냉정한 판단을 해야 한다. 우선 투자수익률이다. 모두가 돈을 쏟아부으며 경쟁하는 상황에서 대학 입학·졸업에 따른 기대수익률은 갈수록 낮아질 것이다. 그래도 인생 노후자금까지 털어 아이를 밀어줄 것인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게 있다면 우리 아이들은 우리가 했듯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독립된 인격체로서 아이의 성장이다. 부모와 아이의 인생은 분명히 다르다. 현명한 부모라면 아이들이 스스로 삶을 꾸려가도록 조력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아이의 모든 일을 쥐락펴락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부모들은 교육 당국에 할 말을 해야 한다. 대입 제도는 좀 더 안정적으로, 예측 가능하게 운영하고, 대학 이외의 다양한 진로를 열어달라는 것이다. 우회로도 많이 만들고, 안내 표지판도 달라는 당당한 요구다. 세상사가 답답하니 단칼에 모든 것을 해결해줄 위인을 고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잠에서 깨면 알게 된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수대] 꽃은 흔들리며 피는 것 안 흔들렸다고 감추는 게 과연 교육적인가-중앙일보

[분수대] 꽃은 흔들리며 피는 것 안 흔들렸다고 감추는 게 과연 교육적인가

[중앙일보] 입력 2012.08.17 00:33 / 수정 2012.08.17 00:33

1980년대 중반에 잠시 고교 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다. 2학년 담임도 맡았다. K 학생이 사고를 친 건 내가 학교에 부임하기 직전이었다. 이미 정학 조치를 받았고, 사건은 경찰에서 검찰로 송치된 상태였다.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K는 소년원에 가야 하지만 선도조건부 기소유예라는 제도를 활용하면 안 갈 수도 있다고 검사가 그러는데, 담임이 서류에 서명하고 책임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처음 듣는 제도였지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러겠다고 했다. 당사자보다 가난에 찌든 그의 홀어머니가 어찌나 고마워하던지 민망할 지경이었다. 이후 K를 여러 차례 만나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무척 순수한 아이였다. 졸업 후 식당 종업원으로 일한다는 소식까지는 들었다. 지금 40대 초반일 것이다.

 도종환 시인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고 읊었다.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라고 했다(시 ‘흔들리며 피는 꽃’). 나도 부모나 교사, 교과서가 가르치는 대로 100% 순종하며 마치 깎아놓은 밤처럼, 기름 바른 미꾸라지처럼 자란 사람은 어딘가 불안하다고 느끼는 쪽이다. 성장기, 특히 사춘기의 일탈은 생물학적 견지에서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받아줄 필요가 있다. 단, 교육적으로 부추길 것은 부추기고 가지를 칠 것은 쳐주어야 한다. 그래야 흔들리며 피는 꽃이 되지 자칫하면 흔들리다 꽃도 못 피우고 꺾인다.

 학교폭력 가해 사실을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하느냐 여부를 놓고 교육과학기술부와 일부 교육감·전교조가 대립하고 있다. 몇몇 교육감과 전교조는 학생부 기재가 가해 학생에게 ‘낙인’을 찍는 일이고 인격권·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고 보는 모양이다. 틀렸다고 생각한다. 흔들리는 과정도 기록하고 안 흔들리게끔, 또는 이왕이면 멋지게 흔들리게끔 가르쳐야지 아예 ‘흔들린 사실 없음’이라며 감추고 눈감자고? 전혀 교육적인 발상이 아니다. 성장 단계마다 자기 행동에 상응하는 책임을 깨닫고 개선하도록 적절한 장치를 두어야 한다. 폭력행위도 마찬가지다. 낙인효과가 걱정이라면 학생부를 대하는 대학당국과 사회의 시각부터 바로잡도록 유도해야 한다. 피해자 입장과 폭력 억제 효과를 떠올려보라. 무엇보다 학생부라는 문서의 정직성·신뢰성을 생각하면 가해 사실 은폐는 답이 아니다. 안 그래도 학생부 윤색(潤色)에 자기소개서 대필 풍조까지 성행하는 판이다.

 빗나간 사랑, 동심(童心)천사주의는 오히려 아이들 장래를 망친다. 학교가 폭력 제재에 손을 놓으면 상대적으로 다수인 피해자군(群)이 그냥 당하고 있을까. 외부의 도움을 구할 것이다. 앞으로 학교가 경찰·변호사들로 북적댈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흔들리며 큰다. 뻔히 흔들리는데 안 흔들린다고 적는 건 위선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할렘 고교의 기적 비결은

할렘 고교의 기적 비결은[중앙일보] 입력 2012.06.23 00:00 / 수정 2012.06.23 00:00

뉴욕 할렘에 자리 잡은 데모크라시 프렙 차터스쿨. 학생의 80%가 흑인, 나머지 20%는 히스패닉이다. 열 명 중 8명이 가난한 편부모 밑에서 자랐다. 7년 전 이 학교를 설립한 세스 앤드루 교장은 학생 면담 후 한 번 더 놀랐다. 맨해튼의 유일한 아이비리그(동부 명문 8개 사립대) 컬럼비아대학이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었지만 거기 가본 적 있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이비리그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이란 단어조차 아이들에겐 생소했다.

 그런데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됐다. 데모크라시 프렙은 지난해 뉴욕주 공립학교 중에서 최고 성적을 냈다. 복도 천장엔 컬럼비아뿐 아니라 하버드·예일·프린스턴 등 아이비리그는 물론이고 연세대 깃발까지 빼곡히 달려 있었다. 한국의 고3에 해당하는 이 학교 예비 12학년 학생들에게 대학 진학은 더 이상 꿈같은 동화가 아니다. 한국에서 원어민 교사를 했던 교장의 한국식 교육 실험으로 할렘의 기적을 일궈낸 고등학교 이야기다.

 학교를 취재하면서 한 가지 의문이 계속 머리 속을 맴돌았다. 한국 학부모의 교육열? 올림픽 금메달감이다. 학생들의 실력? 말할 필요도 없다. 데모크라시 프렙은 ‘자립형 공립학교’다. 학생도 추첨으로 뽑는다. 할렘에서 뽑은 신입생들의 수준? 안 봐도 비디오다. 열정을 가진 교사들이 있지만 한국에도 그 정도 ‘선생님’은 많다. 그런데 한국식 교육의 기적은 왜 할렘에서만 일어난 걸까?

 안개 속을 걷듯 답답하던 머리 속이 학교를 나서는 순간 번쩍했다. 학교 담장은 두 길 높이 철책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안에선 희망이 자라고 있지만 밖엔 절망뿐이다. 진저리처지는 가난, 오금이 저려오는 폭력. 이곳에서 탈출하게 해줄 유일한 동아줄이 바로 학교요 성적이었다. 앤드루 교장이 할렘의 아이들에게 가르친 건 단순히 한국어나 봉산탈춤·태권도가 아니다. ‘나도 대학이란 곳에 갈 수도 있겠다’는 꿈, ‘대학 가면 이 지긋지긋한 절망의 덫에서 해방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었다.

 한국어를 통해 한국이란 먼 나라에서 이뤄낸 성공 신화를 자신의 꿈과 희망으로 체화(體化)한 것이다. 일단 아이들 가슴 속에 꿈과 희망이 뿌리를 내리자 기적의 나무는 스스로 쑥쑥 자랐다. 어느 틈엔가 우리 아이들은 그런 절실함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피눈물을 쏟으며 벗어나고픈 가난도, 생각만 해도 눈물 나게 하는 고향의 가난한 부모님도 이젠 추억담이 됐다. 그런 아이들에게 꿈은 대학 가서나 꾸고 ‘닥치고 수능 성적부터 올리라’니 글자가 교실 허공을 둥둥 떠다니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 아닐까.

 

 할렘의 아이들에겐 내로라하는 강남 학원도, 족집게 과외선생님도, 엄마의 치맛바람도 없었다. 다만 아이들 가슴 속에 꿈과 희망이란 씨앗만 뿌려주자 기적은 저절로 싹을 틔웠다. 하기야 기적은 늘 뭐든 환장하도록 염원하는 사람의 전리품 아니던가.

가정, 처음이자 마지막 배움터

가정, 처음이자 마지막 배움터[중앙일보] 입력 2012.05.21 00:00 / 수정 2012.05.21 00:02

이우근법무법인 충정 대표

 

공교육의 파행(跛行)이 심각하다. 스승의 권위는 일진회의 주먹 앞에서 도통 맥을 못 추고, 학교폭력에 상처 입은 어린 영혼들은 속절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교사가 제자를 성희롱의 노리개로 삼는가 하면, 어린 학생이 스승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도 드물지 않다. 이 절박한 위기 속에서도, 정치색에 물든 교육자치는 교실을 정치투쟁의 실습장으로 몰아가기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전인격’을 지향하는 고전적 교육목표는 헌신짝만큼도 여기지 않는 세태다. 유난히 학벌에 집착하는 우리네의 허영심, 교육의 본질에 투철하지 못한 정책당국의 태만, 상업자본주의에 영혼을 팔아넘긴 얄팍한 시대정신 따위가 이처럼 서글픈 ‘교육의 카오스 시대’를 초래했다.

 미래세대의 삶과 직결된 공교육의 파탄은 정치의 난맥보다 더 깊고 무거운 국가적 불행을 초래한다. 그러나 제도교육보다 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분야가 있으니, 바로 가정교육이다. 치솟는 이혼율, 가정폭력, 서민경제의 파탄 등 갖가지 사유로 수많은 가정들이 파괴되어 가는 현실에서는 튼실한 가정교육을 기대할 수 없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이다. “아들딸 구별 없이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 아래 모두들 아이를 하나씩만 낳아 기르다 보니, 형제자매들의 부대낌 속에서 스스로 절제하며 서로의 갈등을 조절해 가는 지혜를 체득할 수 있는 기회가 상실되고 말았다.

 ‘인류의 교사’로 불리는 페스탈로치의 말처럼 ‘가정은 도덕교육의 터전’이다. 올바른 인성(人性)과 반듯한 삶의 자세는 교사의 입이 아니라 부모의 품에서부터 배워 가는 것이다. 저마다 왕자로, 공주로 자라난 아이들이 올바른 인간관계를 형성해 가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남자들에게는 그나마 공동생활의 마지막 훈련 기회인 군복무마저 이리저리 기피하고 있는 실정이니, 이렇듯 독불장군으로 혼자 커 온 아이들이 무슨 재주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윤리를 배울 수 있겠는가.

 아이들이 싸움을 하면 내 아이를 먼저 야단치는 것이 우리네의 오랜 관습이었다. 상대방 아이의 부모에게는 “제가 잘못 가르친 탓이지요”라며 먼저 머리를 조아렸다. 위선이 아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다. 요즘에는 아이들 싸움이 곧잘 부모의 싸움으로 이어지곤 한다. ‘누가 감히 내 아이를…’ 하는 오기(傲氣)가 살벌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아이의 기를 살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당당하되 양보할 줄 아는 인격, 비굴하지 않되 넉넉히 참아낼 줄 아는 품성을 길러주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상생(相生)의 덕목이다.

 걸핏하면 자녀에게 손찌검을 해대는 아버지, 정직하기보다 일등 하기만을 바라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심성(心性)이란 생각만 해도 안쓰럽다. 여리고 불안정한 인격을 학교에 내던지듯 맡겨놓고 공교육을 탓하는 것은 부모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학교와 교사에게 불만을 쏟아내는 학부모일수록 스스로 가정교육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맥아더 장군은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이런 기도를 드렸다. “정직한 패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승리했을 때 겸손하며, 실패한 이들에게 관대하고, 남을 다스리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알게 하소서.”

 젊은 세대의 인격과 품성에 관한 한, 학교는 제1차적인 책임의 주체가 아니다. 오직 가정만이 그 값진 책임을 다할 수 있는 바탕자리다. 가정은 유치원보다 먼저 입학해서 대학원보다 늦게 졸업하는 평생의 학교이기 때문이다. 아니, 가정에는 졸업이라는 제도가 아예 없다. 오고 오는 세대를 통해 연면히 이어져 가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삶의 배움터’다.

 어버이는 첫 스승이자 마지막 스승이다. 아버지는 살아 있는 역사요 평생의 멘토(mentor)이며, 어머니는 정신의 고향이자 태아 시절부터의 담임선생님이다. 누구든지 세상에 태어나 맨 처음 만나는 사람은 어머니라는 인격, 그 최초의 여성이기에.

 아버지는 집을 짓고, 어머니는 가정을 만든다. 아버지가 가장(家長)이라면, 어머니는 가정의 중심 곧 가심(家心)이다. 아버지들이 산과 들판을 휘저으며 먹잇감을 찾아 생명의 피를 흘리고 생태계에 상처를 입힐 때, 어머니들은 어린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텃밭에서 채소를 경작하며 생명과 자연을 보듬어 안았다. 그래서일까, 조병화 시인은 “어머님은 속삭이는 조국/ 속삭이는 고향…/ 가득히 이끌어 주시는/ 속삭이는 종교”라고 읊었다.

 가정과 스승의 달 5월을 맞아 학교로서의 가정, 스승으로서의 어버이, 가심으로서의 어머니의 자리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꿈이 더욱 절실해진다.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워싱턴=연합뉴스) 이승관 특파원 = 안 던컨 미국 교육부 장관은 7일(현지시간) 일선 교사에 대한 처우개선 및 지위향상 필요성을 주장하며 한국 등을 `모범국가’로 지목했다.

던컨 장관은 이날 `교사감사 주간(Teacher Appreciation Weekㆍ7~11일)’을 맞아 MSNBC방송에 출연한 자리에서 “오늘날 우리보다 더 열성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나라들이 있다”면서 한국과 싱가포르를 예로 든 뒤 “이들 국가에서는 의사, 변호사, 기술자와 교사가 모두 같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에서도 이와 똑같이 해야 한다”며 “우리의 교사들은 국가건설자들(nation builders)이고, 우리는 그들을 존경하면서 그에 맞게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나는 그동안 훌륭한 교사들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해 왔다”면서 “뛰어난 자질을 가진 교사들을 유치하고 보유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미국 대통령도 지난해 국정연설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에서는 교사가 국가건설자로 불린다”면서 “미국에서도 우리 아이들을 교육하는 사람들을 그와 같은 수준의 존경심으로 대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었다.

‘놀토’ 연착륙, 기업도 나서라

‘놀토’ 연착륙, 기업도 나서라

신헌철 SK 부산·대구행복한학교재단 이사장
봄방학을 한 주간 남기고 시작된 ‘새 학년 맞이 특별 새벽기도회’에 예년보다 훨씬 많은 학부모와 어린이들이 교회당을 꽉 메웠다. 긴 겨울방학에 이은 봄방학도 끝나고 다시 시작되는 새 학년 새 학기의 학교 생활을 앞두고 무언가 차분히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 마음에 새벽을 깨우며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지난해 초등학생 수는 53만6000명으로, 1972년의 118만4000명에 비해 반 이상 줄었다. 65년 이래 최저 인원이다. 이 같은 현실 속에서 19대 총선을 앞두고 조사한 국민의 최대 관심사는 학교폭력(95%), 일자리(93%), 인성교육(92%), 서민경제(92%), 양극화와 사회안전망(81%), 공교육(80%) 순으로 나타났다.

교육 분야가 1·3·6위로 등재된 사실에서 대부분의 학부모가 바라는 우선 과제는 최근 각 정당과 정치인이 요란하게 외치는 자유무역협정(FTA)·재벌규제·부자증세·복지확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2일부터 전국 1만1000개의 초·중·고교에서 720만 명의 학생이 일제히 주 5일제 수업에 들어갔다. 98년부터 단계적이면서 실험적으로 시작된 ‘놀토’가 이제 전국의 모든 초·중·고교에서 모든 학생에게 적용됨에 따라 학교·가정뿐 아니라 교육단체·학원, 심지어 종교단체 주일학교까지 상당한 변화를 맞게 됐다. 그동안 정부와 교육 당국이 많은 준비를 해 왔지만 전면적 실시에 따른 시행착오와 문제점을 이른 시일 내에 해결해 정상화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필자는 지난 2년 동안 서울·부산·대구·울산 등의 지방자치단체·교육청과 더불어 저소득층 초등학교 방과후 학교를 관민 합작의 사회적 기업으로 운영하고 있다. 어느덧 이번 새 학기부터는 550명의 강사와 함께 1만5000명의 초등학생이 매일 정규 수업을 마친 뒤 오후 2시부터 저렴한 수업료를 내고 각종 학습·인성·스포츠·컴퓨터 등을 배우고 있다. 짧지만 2년 동안의 초등학교 방과후 학교 운영 경험에 비춰 보면 전면적 ‘놀토’ 시행에 따른 효과가 빨리 나타나기 위해서는 ‘놀토’가 오히려 ‘멍에’가 된 저소득층 학부모와 학생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해결해 줘야 한다.

 첫째, 준비가 부족한 저소득층 자녀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 기초수급자와 차상위계층은 물론이고 맞벌이를 해도 ‘놀토’를 갖지 못하는 학부모들은 집에서 혼자 맴돌게 될 자녀 생각에 답답하기만 하다. 전국 720만 명의 학생 가운데 기초수급자와 차상위계층 자녀는 75만 명이며 이 중 37만 명이 돌봄이 필요한 초등학생으로 추산된다. 따라서 이들 중 상당한 학생이 별다른 대책이 없으면 ‘놀토’마다 TV·게임·PC방·길거리 배회에 더 많이 치우칠 수밖에 없다.

 둘째, ‘놀토’가 학습·인성·체험교육으로 활용되므로 사교육비가 늘어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교육 영향력은 그만큼 커지게 되므로 이에 대한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벌써 토요학습반 학원 수강생이 20~30% 늘고 있고 토요심화반도 생기고 있다. 가정형편이 좋은 아이들이야 ‘놀토’에서 영어·수학·피아노·농구·태권도 등에 월 100만원이 지불되더라도 장래 투자로 여길 수 있지만 저소득계층에서의 교육비 증가는 그야말로 ‘멍에’가 된다.

 셋째, 전면적 ‘놀토’ 시행이 지역 간, 계층 간 교육 격차를 심화시키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 한국은행 발표에 따르면 국민소득 상위 20% 계층은 하위 20% 계층에 비해 학원교육비(월 30만9000원)가 8.1배 많으며 소득 중 교육비 비중(15%)도 2배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놀토’가 도시와 농촌, 대도시와 중소도시 간의 교육 격차를 더욱 벌어지게 하거나 교육 기회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면 결국 소득불평등의 확대, 재생산에 기여하는 꼴이 될 것이다.

 미국 뉴욕시의 123개 ‘작은학교’가 공립학교의 새 모델로 소개됐다. 이는 블룸버그 시장이 히스패닉과 흑인 등 저소득층 학생들의 학업을 위해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추진해 온 결과다. 여기에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의 기금(5120만 달러)이 씨앗이 됐다고 한다. ‘놀토’가 우리 교육의 새로운 성공이 되기 위해서는 정부와 교육 당국이 특히 저소득층의 ‘멍에’를 벗기는 일에 소매를 걷어야 한다. 여기에 저소득층 학생들의 교육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몇몇 기업 외에 더 많은 기업이 스스로 한두 가지씩 기업 역량을 보태야 한다. 아이들의 미래가 곧 기업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신헌철 SK 부산·대구행복한학교재단 이사장

‘놀토’에 놀면 안 되는 거니?

 ‘놀토’에 놀면 안 되는 거니?  – 양선희 중앙일보 논설위원

드디어 우리 아이들이 매주 이틀을 놀게 됐다. 학창 시절 가장 바랐던 게 ‘토요일에 학교가 쉬었으면’ 하는 거였는데, 이제라도 그런 날을 보게 돼 기쁘다. 한데 ‘놀토’를 맞는, 학생과 학부모들은 그다지 기쁜 표정이 아니다. 중학생 자녀를 둔 한 엄마는 “놀토를 허송세월하지 않도록 스케줄 짜느라 골치가 다 아프다”고 했다. 그의 중학생 아들은 당연하다는 듯 “학원에 다녀야죠” 한다. 강남 엄마들은 벌써부터 토요일 팀 과외 일정 짜기에 분주하다.

 대한민국 학원의 경쟁력은 이번에도 입증됐다. 이달 주5일제 수업 시작에 학교와 지역 사회는 ‘놀토’ 대비가 됐느니 안 됐느니 말이 많은데 학원가는 이미 만반의 준비가 끝난 것으로 보인다. 학원가엔 토요일 오전 강좌 스케줄이 빼곡히 잡혔고, 금요일 저녁에 입소해 일요일 밤에 퇴소하는 2박3일제 기숙학원도 등장했다. 일단 입소하면 나갈 수도 없고, 밤 12시 전에는 재우지 않는 스파르타식 학원을 표방한다.

 한편에선 학교 놀토 프로그램이 빈곤하다며 질책이 쏟아진다. 학생 참여도 적고, 지도 강사와 내용도 부실하고, 어느 학교는 그저 영화만 틀어줬고, 도서실에서 빈둥거리도록 방치해 시간낭비가 많았다는 등이다. 그런가 하면 ‘좋은 부모’들은 토요일마다 아이들과 어떻게 하면 유익한 시간을 보낼까 하는 문제로 고민이 많다. 첫 놀토를 맞은 3일 에버랜드 입장객이 지난해 격주 놀토보다 30%나 늘었단다. 중1 아들을 둔 모씨는 부자간 정도 쌓고 아들의 호연지기를 길러주기 위해 토요일마다 백두대간에 오르는 산행을 아들에게 제안했단다. 나름대로 상당한 희생과 귀찮음을 각오한 것인데, 정작 아들은 “아빠,그거 꼭 해야겠어요?”라며 시큰둥하단다.

 완전 놀토를 맞은 우리 사회의 관심은 이렇게 토요일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유익하게, 시간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보낼지에 집중되고 있다. 당장 입시전쟁이 코앞인 고등학생들은 학원 프로그램에 가위눌리고, 뒤처질 것 같은 불안감에 놀토에도 학원으로 내몰린다. 초등학생들도 다르지 않다. 부모는 아이들을 눈에서 놓치지 않고, 하나라도 더 배우게 하고, 다른 애들이 하는 건 다 하게 하려고 안달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휴일을 꼭 그렇게 유익하고 효율적으로 보내야만 하는지. 놀토는 말 그대로 노는 날인데, 그냥 좀 잘 놀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다. 꼭 부모와 함께 놀아야 할 필요도 없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초등학생 때 부모와 놀지 않았다. 놀자고 하면 오히려 귀찮았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론 ‘과외금지령’이 있던 5공 시절 학교에 다닌 덕분에 학원 문전에도 못 가보고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남아도는 시간에 가끔은 친구들과 놀고, 대부분은 방에서 뒹굴며 ‘허송세월’을 했다. 한데 그런 심심한 시간 속에서 공상도 하고, 낙서도 하고, 소설도 읽고, 글도 쓰면서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졌던 게 지금 나의 가장 큰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당시엔 인터넷이 없었던 게 다행이긴 했다.

 “고독은 창의성의 열쇠다.” 지난주 미국에서 열렸던 지식축제 TED콘퍼런스에서 미국 작가 수전 케인이 한 말이다. 흔히 세상은 밖에 나가 다른 사람들과 더 많이 어울리고 외향적이 되라고 강요하지만 실제로 세상을 바꾼 지도자와 창의적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자신을 고독하게 놔둘 줄 알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끝없이 가르치고 주입한다고 그 모든 것이 아이의 지식이 되진 않는다. 아이들을 심심하게 놔두고, 무념무상으로 뛰어놀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창의성을 기르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물론 아이들은 무조건 안전해야 한다. 운동장·공원과 도서실 등 아이들이 노는 공간을 마련하고, 물리적 안전은 섬세하게 지키고, 기다려 주는 일이 어른들이 할 몫이다. 우리 아이들이 놀토에 부모의 간섭과 인터넷·SNS의 정보 폭주와 같은 외적 자극에서 벗어나 심심하게 뒹굴거나 아무 생각 없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

“없이 산 애는 독해서 안 돼” 오래전 사모님 말씀 이제 와 답하고 싶은 건

“없이 산 애는 독해서 안 돼” 오래전 사모님 말씀 이제 와 답하고 싶은 건 …[중앙일보] 입력 2012.03.05 00:36 / 수정 2012.03.05 00:36

 
벌써 한참 전 이야기다. 큰 도움을 여러 차례 받은 먼 친척 어른이 계셨다. 어머니는 명절이면 나와 여동생을 깔끔히 차려입혀 그 댁으로 보냈다. 소소한 심부름이라도 하라는 뜻이었다. 저택은 늘 사람들과 선물들로 북적댔다. 때론 그 댁 언니·오빠,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럴 때면 왠지 안간힘을 쓰는 듯한 기분이 돼버렸다. 햄버거를 처음 먹은 것도 그 댁에서였다.

 대학 입학하던 해 그 댁 안주인으로부터 “큰아들 여자친구를 좀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어떤 아가씨를 원하느냐 물으니 “너무 없는 집 아이만 아니면 된다”고 했다. “그런 애들은 독하고 베풀 줄 모른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모멸감이 들었지만 일견 수긍했다. 안 그래도 그 즈음, 내 타고난 인간적 단점들이 팍팍한 현실로 인해 악화될 수 있겠다는 자각을 한 터였다. 균형 잡힌 사람이 되고자 더 노력하는 계기가 됐다.

 훗날 기자가 돼서야 내 ‘초년 고생’이 갖는 가치에 새삼 눈떴다. 뉴스의 이면, 사람의 속내를 파헤치는 것이 기자 일이다. 많이 듣고 많이 보고, 감성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다양한 위기를 경험해본 쪽이 아무래도 유리하다. 실력도 노력도 턱없이 부족한 내가 그나마 이제껏 펜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이지 싶다. 비슷한 연유로 나는 교육자나 법조인 또한 가능하면 다양한 내적·외적 경험을 쌓은 이들로 채워졌으면 한다. 한데 며칠 전 신문을 보다 그만 “음…” 하는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올 국가장학금 신청 대학생 가정의 소득 수준을 분석한 기사였다. 상위 10% 가정의 자녀가 가장 많이 다니는 학교는 이화여대(43.8%), 그 다음이 서울교대(38.3%)였다.

 교대 졸업생들이 훗날 맡을 학생의 상당수는 중산층 이하 가정 자녀다. 빈부 격차 심화는 교육 현장에도 큰 도전이다. 경제적·정신적 좌절에 익숙지 않은 교사들이 이 난제를 현명히 헤쳐갈 수 있을까. 법조·정치계도 마찬가지다. 외고 출신 ‘엄친아’는 이미 사법부의 대세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모든 법적 판단의 배경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 부유한 환경은 둘째 치고, 부모가 가라는 길로만 걸어온 친구가 많아 큰 걱정”이라고 했다. 정치권으로 말하자면, 그런 사법부를 가장 안정적 인재 풀로 친다. 이른바 ‘엘리트 공천’ 이슈의 핵심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의 영향력 큰 자리는 대개 시험 성적으로 그 주인을 가리는 경향이 있다. 다른 건 몰라도 교사·법조인, 기자나 공무원을 뽑을 땐 좀 다른 잣대를 들이댔으면 한다. 그가 겪지 않아도 될 불편과 고난을 자초한 적 있는지, 그를 통해 자기 삶을 구체적·실질적으로 변화시킨 측면이 있는지. 여론 주도층에 다양한 목소리가 합류할 길을 여는 건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절박한 문제다.

이나리 논설위원

학교폭력 추방? 공문부터 추방하라

학교폭력 추방? 공문부터 추방하라

[중앙일보] 입력 2012년 02월 17일

강홍준
논설위원
학교폭력 근절이란 해묵은 과제가 이번엔 풀릴까. 이달 초 국무총리를 비롯해 4개 부처 장관이 합동으로 종합대책을 내놓은 뒤 이런 기대감은 어느 때보다 높다.

 이런 마당에 찬물 끼얹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단언코자 한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이번 대책 역시 필패(必敗)다. 국무총리가 매달 학교를 찾아가 점검한다고 했는데도 그럴까. 물론 가해학생들에 대한 처벌이 대폭 강화됐으며, 경찰이 적극 이 문제에 개입하기로 해 폭력 발생이 수그러드는 반짝 효과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약효는 떨어질 것이다. 반감기는 1년쯤 될 것이다.

 이런 음울한 예측을 하는 이유가 있다. 정책 결정자의 열의가 부족해서? 그렇지 않다. 1995년 이후 정부가 여러 차례 종합 대책을 내놨으나 실패했던 이유와 같다. 정책집행 단계에서 교육청·교육지원청·학교로 이어지는 행정 조직은 과거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

  상황은 이렇다. 학교폭력이 전 국민의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조직 상층에서 하층으로 향하는 압력은 아주 강해졌다. 그 결과 교육행정조직의 말단인 학교는 종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지시를 받고 있다. 대책에 담긴 90여 건의 과제는 공문으로 학교에 투하될 것이다. 발신 교육청 또는 교육지원청, 수신 학교장이라고 적힌 공문엔 ‘몇 월 며칠까지 학교 자체 계획을 세워 제출하시오’ ‘실적을 보고하시오’라는 요구 사항이 달려 있을 것이다. 학교폭력 말고도 지시 사항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위에서 쏟아지는 물이 중간에 걸러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불어나 바닥을 채우는 형국이다.

 교장은 자신의 인사 및 평가권자인 교육청 등에서 내려온 이런 지시에 신경 끄고 살 수 없다. 일반 교사들은 “교육청은 공문 생산 공장이냐”며 불만을 터뜨리면서 시간을 쪼개 보고서를 만든다. 보고를 위한 보고서 작성, 실적을 뽑기 위한 통계 산출 과정에서 폭력 발생 건수는 줄고, 예방 활동 건수는 늘어난다. 이러다 보면 곪은 상처는 수치 뒤로 꼭꼭 숨을 수밖에 없다. 이러다 실패의 순환 고리에 점점 빠져든다.

 학교폭력 근절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건 지시하거나 보고를 받는 관료가 아니다. 열쇠는 아이들 사이에 폭력의 징후가 있지나 않은지 부단히 챙기고 관심을 놓치지 않는 교사에게 있다. 어차피 교사는 제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대해 도덕적으로 무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실패의 순환고리를 깨려면 무엇보다 교육청, 교육지원청부터 일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학교에 발송 당일 결과를 보고하라는 공문부터 당장 중단해야 한다. 학교에 당일 보고하라고 요구하는 공문이 전체의 60.4%라는 경기도교육청의 조사도 있다. 실적을 취합하라는 공문도 20% 이상 줄여야 한다. 그 대신 교육지원청에 있는 장학관·장학사, 일반 관료들이 움직여야 한다. 지시만 하지 말고, 학교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발 벗고 나서라는 말이다.

 학교도 일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담임 맡는 교사는 수업과 생활지도에 더 시간을 쓰게 하고, 비담임 교사는 행정업무처리에 시간을 더 배정하도록 업무를 다시 나눠야 한다. 교장과 교감은 업무 배분을 잘해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집중하게 해야 한다. 감포(교감되기를 포기한 고령 교사)도 이번엔 불구경하듯 뒷짐 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온갖 궂은 일은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에게 떠넘기는 관행도 달라져야 한다.

 그리고 교육청이나 학교 모두 “안 돼~” “사람 불러야 돼”란 말 좀 그만해야 한다. 학급당 학생 수, 학생당 교직원 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수준에 미치지 못해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니 돈이나 사람이 더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아무 해결책도 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다 갖춰진 다음에야 움직이겠다는 태도부터 버려야 한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스스로 달라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돈과 사람 탓만 하다간 개그콘서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기고자 : 강홍준

창조적 아이디어는 지루하다 느낄 정도로 빈둥거릴 때 나온다

“창조적 아이디어는 지루하다 느낄 정도로 빈둥거릴 때 나온다”[중앙일보] 입력 2012.02.18 00:23 / 수정 2012.02.18 00:23

[일러스트=차준홍 기자]

대세는 ‘스마트(smart)’다. 스마트가 제일 잘나간다. 전화는 ‘당근’ 스마트폰이어야 하고, 텔레비전도 스마트TV가 ‘뉴 노멀(new normal)’이다. 스마트란 말이 붙어야 뭔가 있어 보이고, 세련돼 보인다. 최첨단이라는 느낌도 준다. 본래 영어 단어 스마트의 제1 어의(語義)는 똑똑하고 영리하다는 뜻이다. 세련되고 멋지다는 뜻도 있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그 의미가 진화하고 확장되면서 ‘전자제어 장치나 컴퓨터로 작동하는’이란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컴퓨터로 원격 조종되는 전자유도 무기는 스마트 웨펀(weapon)이고, 전자제어 시스템으로 자동 관리되는 건물은 스마트 빌딩이다. 스마트폰과 스마트TV란 말도 여기서 나왔다.

 행정중심복합도시인 세종시에 스마트 스쿨이 선을 보였다. 최첨단 정보기술(IT)의 성과가 망라된 ‘꿈의 학교’다. 정부 부처 공무원 자녀들이 주로 다닐 학교답다. 교실에는 72인치 전자칠판과 PC가 장착된 전자교탁, 무선안테나가 설치되고, 학생들에게는 태블릿 PC인 스마트 패드가 지급된다. 교사가 전자칠판에 쓴 내용은 스마트 패드에 실시간으로 뜨고, 학생이 스마트 패드에 적은 질문과 답안은 전자칠판에 자동 입력된다. 학생들은 스마트 패드만 들고 다니면 된다. 책가방이 필요 없다. 스마트 스쿨에서 공부하면 아이들도 스마트해질까.

 미국 IT산업의 메카인 실리콘밸리에는 발도르프 학교가 있다. 학생들 대부분이 구글이나 애플 같은 IT 기업 종사자 자녀다. 이 학교에는 컴퓨터가 없다. 휴대전화나 아이패드도 못 갖고 다닌다. 대신 교실마다 백과사전이 있다. 이 학교 졸업생의 94%가 대학에 진학한다. 명문대에 들어가는 학생도 많다.

 인텔 내 ‘사용자 상호작용·경험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즈느비에브 벨(인류학) 박사는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뇌가 지루하다고 느낄 때 나온다”고 말한다. 창의성은 스마트함의 다른 말이다. 스마트해지길 원한다면 가끔씩 지루하다고 느낄 정도로 빈둥거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벨 박사는 늘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집착을 버리고, 미리 시간을 정해 그 시간에만 e-메일을 확인하고, 집 안에 IT기기가 없는 공간을 만들고, 인터넷이 안 되는 곳으로 휴가를 떠날 것을 권한다.

 디지털 시대에 IT기기 없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너무 한쪽으로만 쏠리는 것은 문제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균형이 중요하다. 디지로그다. 스마트폰도 좋고, 스마트 스쿨도 좋지만 적어도 주말에는 스마트한 세상과 담을 쌓고 ‘덤(dumb)’하게, 즉 ‘후지게’ 지내보는 것이 어떨까. 컴퓨터와 TV를 끄고 자녀들과 빈둥거리는 것 말이다. 아이들과 함께 종이로 된 신문이나 책을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이들이 진짜로 스마트해지길 원한다면 말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