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교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중앙일보] 입력 2015.03.26 00:03 / 수정 2015.03.26 00:17

 
이도은 중앙SUNDAY 기자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지난주 학부모 총회에 가서 마치 엄마가 초등학생이 된 양 담임 선생님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마무리가 될 때쯤 개인 상담 일정을 알려줬다. 그런데 선생님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어머님들 학교 오실 때 아무것도 가져오지 마세요. 커피 한 잔도 안 됩니다. 진짜요.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세요.”

 이날은 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감 조희연)이 ‘2015년 불법찬조금 및 촌지 근절대책’을 발표한 다음날이었다. 교직원이 촌지 받은 사실을 신고하면 최고 1억원의 보상금을 준다는 초강력 방침을 선생님이나 학부모나 모두 알고 있을 터. 선생님의 한마디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궁금했다. 촌지 없애자는데 간식까지 막는 이유는 뭘까. 학부모 선배들의 설명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었다. 간식 하나에도 생길 수 있는 차별에 대한 가능성을 아예 봉쇄하자는 거다. “누구 엄마가 마트에서 주스를 사 가면 다른 엄마는 백화점에서 100% 과즙을 가져오게 되죠. 그러면 선생님도 사람인데, 더 맛난 걸 좋아하지 않겠어요.”

 맞다. 선생님도 좋은 게 뭔지 아는 보통 사람이다. 도덕성 면에서도 보통 사람일 확률이 높다. 듀크대 행동경제학 교수인 댄 애리얼리에 따르면 세상 98%는 절대 성자도 절대 악인도 아닌 평범한 인간이다. 그러기에 때로는 선하고 때로는 악하다. 스스로를 ‘대체로 착하다’고 자평하면서도 무의식중에 악행을 저지른다(『거짓말 하는 착한 사람들』).

 악행이라고 해서 별게 아니다. 가령 MIT 기숙사에서 공용 냉장고에 1달러짜리 6장을 넣어놓으니 학생들이 아무도 손대지 않는다. 하지만 가격으로 따지면 이와 비슷할 콜라 6개들이 한 팩을 넣어놓았더니 결과가 달라진다. 그건 72시간 안에 모두 사라진다. 말하자면 돈의 추상성이 강해질수록 부정행위의 유혹에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현금은 좀 그렇지만 문화상품권은 받게 되더라”던 교사 친구의 고백도 연장선상에 있다.

 또 보통 사람의 가장 큰 맹점은 한 번 사소한 비행을 저지르면 무뎌지기 쉽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다이어트를 한 뒤 저녁에 쿠키 한 조각을 먹고 나면 폭식으로 이어지는 경우라거나, 문제집을 풀다 답안지를 들추게 되면 멈추지 못하는 때도 그렇다.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라는 심리다.

 촌지는 학부모와 교사를 떠나 평범한 한 인간을 시험대에 오르게 하는 일이다. ‘달라니까 준다’는 카더라식 경험담만큼이나 ‘주면 받더라’는 사례도 아직은 심심찮게 들린다. 전자라면 고민이 깊겠지만 적어도 보험 들 듯 건네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안 받으면 그만 아니냐”는 학부모는 무책임하다. 같은 논리라면 “안 주면 그만” 아닌가.

이도은 중앙SUNDAY 기자

교육은 따뜻해야 합니다-선물과 촌지의 의미

[분수대] 교육은 따뜻해야 합니다

[중앙일보] 입력 2015.03.23 00:03 / 수정 2015.03.23 00:05

주철환 아주대 교수·문화콘텐츠학
 

‘촌지 동영상’이라는 검색어가 떴다. 학교 폐쇄회로TV(CCTV)에 찍힌 증거 영상? 아니면 작정하고 찍은 몰래카메라? 클릭해 보니 서울시교육청이 ‘청렴 무결점 운동’을 펼치며 제작한 캠페인이다. 주제는 분명했으나 구성은 취약했다. 의도는 충분히 알겠는데 성과는 충분하지 않았다.

 성우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우리 아이가 울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교육은 따뜻해야 합니다.” 하지만 표현방법은 따뜻하지 않았다. 화면 속 아이는 혼자 우는데 촌지를 주고받는 교사와 학부모는 크게 웃는다. 카메라에 현장이 잡히고는 화들짝 놀란다. 놀라는 배우의 표정이 누군가를 놀리는 듯하다. 어색한 상황이 복도·교실·주차장 등 장소를 달리하며 반복된다.

 영상을 본 교사들 반응은 어땠을까. 대부분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기자는 전한다. 부끄러워서? 교사들은 뭐가 부끄러웠을까? “아직도 동료 교사 중에 저런 사람이 있다니….” 그것보다는 “이런 모욕감을 느끼려고 내가 교직을 택했던가?” 이 점이 더 아프지 않았을까? 교사 출신인 내가 봐도 반성보다는 반발의 감정이 앞섰을 것 같다. 교사의 자존감을 꼭 저런 식으로 짓뭉개야 했나? 교사의 사(師)는 박사의 사(士)나 판검사의 사(事)와는 다르다.

 촌지는 마음이 담긴 작은 선물이다. 자식을 맡아 키워주는 선생님께 조그만 감사의 뜻을 전하는 게 뭐가 나쁜가? 많이 나쁘다. 봉투 속에 감사가 아니라 청탁이 담겼기에 나쁘다. 공평하지 않아서 나쁘다. “내 아이를 잘 봐주세요”가 아니라 “내 아이만 특별히 잘 봐주세요”이기에 나쁘다.

 촌지가 아름다우려면 시간이 흘러야 한다. 중학교 1학년 때 만난 국어선생님(고3 때는 담임까지 맡으셨다)을 나는 평생 가슴에 안고 산다. 스승의 날마다 ‘촌지를 들고’ 찾아뵙는다. 재학 중엔 촌지를 드릴 형편이 못 됐다. 드린다고 받으실 분도 아니었다. 그분을 나는 로댕에 비유한 적이 있다.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나는 구리와 주석에 불과했다. 그분의 숨결과 손길이 닿아서 나는 ‘생각하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 고맙기 그지없는 분이다. 그분께 드리는 촌지는 그야말로 은혜의 정표다.

 당신을 만든 로댕 선생님은 지금 어디 계시는가. 올 스승의 날엔 은퇴한 은사님을 찾아 촌지를 드리자. 누가 막겠는가. 그런 걸 찍은 촌지 동영상이 있다면 진짜로 세상이 따뜻해질 것이다.

주철환 아주대 교수?문화콘텐츠학

저출산 한국, 초등학교 등교시간부터 앞당겨라

저출산 한국, 초등학교 등교시간부터 앞당겨라

 

[중앙일보] 입력 2015.01.02 02:30

세계적 인구학자의 조언
마이클 타이털바움 박사 인터뷰
한국 아이들 학교 머무는 시간 짧아
젊은 부부 직장과 육아 병행 어려워

인구 문제는 언제나 지도자들의 관심사였다. 사람이 병력(兵力)이자 노동력이던 시절엔 더욱 그랬다. 1919년 10월 11일 프랑스 상원.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하는 베르사유 조약 비준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의원들 앞에서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프랑스가 출산에 등을 돌린다면 독일의 모든 무기를 빼앗고 원하는 모든 것을 얻어낼지라도 패배하게 된다. 왜냐하면 더 이상 프랑스인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 인구는 3900만 명, 독일은 6500만 명이었다(현재는 프랑스 6600만 명, 독일 8000만 명).

을미년 새해 첫날 0시0분에 서울 강남구의 한 병원에서 태어난 남자 아기. 출생아수는 계속 줄어 2013년 한 해 태어난 아기는 모두 43만6600명이었다. [뉴시스]

 세계적 인구통계학자 마이클 타이털바움(71) 박사는 공저 『인구 감소의 공포 』(1985)에서 “프랑스 인구성장이 독일에 못 미친다는 열등감이 프랑스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며 “인구는 국가 안보와 경제, 민족 구성과 종교에까지 폭넓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출산율이 너무 낮거나 높을 때 인구 문제는 국가 어젠다가 된다”고 썼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베이비붐이 일면서 식량난과 빈곤, 환경 파괴가 우선적인 걱정거리였지 저출산 고민은 쑥 들어갔다. 그러다 80~90년대 이후 출산율이 하락세로 돌아서자 세계 곳곳에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때론 공포가 조장되기도 한다. ‘2700년 한국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2009년 유엔미래보고서)거나 ‘2200년 한국 인구가 200만 명으로 쪼그라든다’(2014년 국회입법조사처 보고서)는 예측이 그 사례다. 그렇다면 저출산 등에 대한 우리의 고민은 과장된 것일까.

 최근 방한한 타이털바움 박사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과 한국인구학회가 주최한 ‘21세기 인구변동과 사회변화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인구 정책은 과장된 경고, 암울한 예언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성적으로 대응한다는 기본원칙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저출산은 암울한 것, 맞지 않나.

 “출산율 감소는 인류 번영에 기여한 측면도 있다. 아이를 적게 낳는 과정에서 여성의 사회적 권리가 증대됐다. 여성도 배울 수 있게 됐고 경제활동 참여도 늘었다. 부모의 역량을 소수의 자녀에게 쏟아부음으로써 교육의 질을 높여 우수 인재를 양성했다. 국가 경제적으로는 생산성을 높인 결과를 가져왔다.”

 - 저출산 경보음에 대해 경고를 보내는 이유는.

 “저출산 문제에 대한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대재앙이 닥칠 것처럼 과장하는 일은 인구 분야에서는 종종 일어난다. 이런 패닉과 공포는 올바른 판단을 방해하고 문제를 복잡하게 해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수백 년 후에도 모든 조건이 현재와 같다는 전제의 예측인데 과학 발전 등 우리 삶이 지금과 같지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인구 변화는 속도가 완만하다.”

 - 한국 출산율 1.19명도 괜찮다는 건가.

 “아니다. 낮아도 너무 낮다. 오랜 기간 1.0~1.2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 심각하다.”

 - 출산율 하락의 근본 이유는 뭔가.

 “사는 게 팍팍해져서 아닐까. 한국뿐 아니라 세계의 공통적인 고민이다. 평생 고용이 사라진 시대에 20~35세 젊은 성인들은 가진 자원을 학력과 경력 관리에 집중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맞벌이도 해야 한다. 결혼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건 후순위가 될 수밖에 없다.”

 - 출산율 제고 해법은.

 “젊은 부부가 자녀를 낳기 어렵게 하는 장애물부터 치워야 한다. 학교 교육, 주택, 일자리 정책을 두루 살펴 출산과 충돌이 일어나는 부분을 찾아내야 한다. 한국 초등학교는 등교시간이 미국보다 늦고 하교시간은 빠르다고 들었다. 미국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오전 8시~8시30분에 등교해 오후 3~4시쯤 마친다. 한국처럼 오전 8시40분~9시에 등교해 낮 12시30분~1시30분쯤 끝나면 부모, 특히 엄마들은 일을 하기 어렵지 않나. 출산을 방해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미국 출산율은 1.88명이다.”

 - 그밖에 장애물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한국도 높은 집값이 젊은 부부의 결혼과 출산의 발목을 잡는다고 들었다. 젊은 부부들이 주택시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정부가 진입장벽을 낮춰줘야 한다. 청년층과 중장년층 간 격차를 줄이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경기 침체로 중년층도 위기를 느끼겠지만 청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젊은이들이 가정을 꾸릴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

 타이털바움 박사는 “한국의 초등학교 수업시간이 짧은 이유가 궁금하다”며 “미국은 8~9세면 오후까지 학교생활을 할 수 있는 체력과 집중력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저출산 대응책은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사회·문화적 요소들을 재점검하는 데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 정부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출산율을 높인 방법은 나라마다 다르다. 스웨덴과 프랑스를 ‘출산율 우등생’으로 꼽는데 두 나라는 각각 여건에 맞는 출산정책을 폈다. 스웨덴은 여성과 남성이 일과 육아를 나눌 수 있도록 직장에서의 양성평등 정책을 강화했다. 프랑스는 공공보육시설을 적극 지원해 품질과 신뢰를 높이는 방식을 택했다. 한국적 상황에 맞는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그는 정부가 저출산·고령화 대책으로 200여 가지 정책 과제를 제시한 것을 놓고 “이렇게 많은 정책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과 같다”며 “실패하기 쉽다”고 평가했다. 제2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2011~2015년)은 올해 끝난다. 제1차 대책 이후 출산율은 1.12명(2006년)에서 1.19명(2013년)으로 제자리걸음이다. 정부는 올해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2016~2020년)을 수립한다.

박현영 기자

[The New York Times] 꿈꾸면 다 이뤄진다고요?

[The New York Times] 꿈꾸면 다 이뤄진다고요?

[중앙일보] 입력 2015.01.02 00:03 / 수정 2015.01.02 02:19

 
리처드 A 프리드먼 웨일 코넬 의대 교수·임상정신의학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복권 당첨이라는 꿈을 꾸고 있는 어떤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복권에 당첨될 수 있다는 간절한 환상에 젖어 있었지만 결과는 항상 ‘꽝’이었다. 참다 못해 하늘에 계신 신(神)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랬더니 하늘에서 충고의 말씀이 들려왔다. “일단 복권을 사야 당첨되지 않겠느냐?!”

 분명한 것은 이 꿈꾸는 듯한 눈을 가진 친구가 우리 중 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처럼 구식 긍정적 사고(positive thinking)의 힘을 믿는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 여러분이 추구해야 할 꿈을 발견하라. 그 꿈을 소망하라. 그러면 성공은 온전히 여러분의 것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다’는 것이 가브리엘 오틴젠(Gabriele Oettingen) 박사가 연구를 통해 내린 결론이다. 그는 뉴욕대(NYU)와 함부르크대의 심리학 교수다. 오틴젠 교수는 이 조크를 인용하며 긍정적 사고의 힘이라는 통념의 한계를 드러낸다. 지난해 10월 발간된 그의 『긍정적 사고의 재고(再考): 동기부여에 대한 새로운 과학 』은 스마트하고 명료한 책이다. 이 책에서 오틴젠 교수는 긍정적 사고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한다. 탄탄한 경험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동기부여에 대한 보다 균형 있고 쓸모 있는 이해를 독자들에게 제공하기 위해서다.

  통념에 따르면 꿈은 우리를 자극한다. 또 행동하는 데 필요한 영감을 준다. 과연 그런지 실제로 실험해보기 위해 오틴젠 교수는 대학생들을 모집해 무작위로 두 그룹으로 나눴다. 첫 번째 그룹에 내린 지침은 다음과 같다. 다음주에는 신나는 일만 일어날 것이라는 환상을 가져라. 예컨대 높은 학점을 받게 되고 멋진 파티에 가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라. 두 번째 그룹 학생들에게는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다음주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일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몽상을 떠오르는 족족 그대로 기록하게 했다.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긍정적으로만 사고하라는 지침을 받은 학생들은 ‘중립적’인 환상을 가지라는 지침을 받은 학생들보다 자신들이 활기가 덜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취감도 덜했다. 이 실험이 알려주는 것은 맹목적인 낙관주의가 결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을 현실에 느긋하게 안주하게 만든다. 왜 그럴까. 우리가 바라는 것에 대해 꿈꾸거나 환상하면, 우리들은 우리가 바라는 목표에 도달했다고 착각하는 ‘속임’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생리학적인 근거가 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어떤 소원에 대해 환상하는 것만으로도 혈압이 내려간다. 하지만 같은 소원에 대해 생각할 때 그 소원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까지 고려하면 혈압이 올라간다. 공상을 하면 기분은 좋지만, 무기력해지고 자신이 취할 행동에 대해 덜 대비하게 된다.

 사람들이 실제 난관을 즉각 즉각 극복해 나감으로써 소원을 성취하도록 돕기 위해 오틴젠 교수와 동료 연구자들은 ‘정신적 대조(mental contrasting)’라는 기법을 개발했다.

 오틴젠 교수는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정신적인 대조’ 연습을 하게 했다. 영어 숙제를 끝내면 캔디를 상으로 받게 된다고 상상하게 했다. 동시에 상을 못 받게 만들 그들 자신의 여러 행동에 대해서도 상상하라고 했다. 다른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상 받는 상상만 하라는 지침을 줬다. ‘정신적인 대조’를 한 학생들이 꿈만 꾼 학생들보다 성취도가 높았다.

 ‘하면 된다’는 태도가 문화적으로 팽배하다. 하지만 꿈뿐만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나 세상이 만든 난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목표를 보다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인 것 같지만 오틴젠 교수에 따르면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꿈에 대해 생각해보시오’라는 말을 들은 사람 6명 중 1명만이 꿈과 난관을 즉각적으로 동시에 생각한다.

 오틴젠 교수는 사람들의 행동을 실제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 그는 경험적으로 입증된 정신 대조법을 확장해 간단하고도 효과가 신속한 대안을 제시했다. 대안의 이름은 ‘WOOP’다. WOOP는 ‘소원·결과·난관·계획(wish, outcome, obstacle, plan)’의 약자다. 오틴젠 교수는 WOOP라는 이름으로 무료 스마트폰 앱을 개발했다.

 오틴젠 교수가 제시하는 예비적인 데이터에 따르면, 정신적 대조를 하면 여러 가지 좋은 점이 있다. 식사와 운동, 음주 습관이 개선된다.

 그가 개발한 정신 대조법은 건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진 않을까.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인격장애 같은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까. 오틴젠 교수의 학문적 호기심을 감안하면 그는 이미 WOOP의 적용 대상을 확장하는 연구에 착수했을 것 같다.

리처드 A 프리드먼 웨일 코넬 의대 교수·임상정신의학

[백성호의 현문우답] 재촉하는 부모, 기다리는 부모

[백성호의 현문우답] 재촉하는 부모, 기다리는 부모
[중앙일보] 입력 2014.10.25 00:10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아빠, 정말 무서워.”

 두 발 자전거는 처음입니다. 둘째 아이는 열 살. 그동안 네 발 자전거를 탔습니다. 매사에 조심성이 많은 편입니다. 지난 주말, 양재천으로 갔습니다. 다리 밑 공터에서 아이는 두 발 자전거에 올랐습니다. 아내와 저는 “짧으면 일주일, 길면 한 달쯤” 예상했습니다. 혼자서 페달을 밟을 때까지 말입니다.

 조마조마합니다. 뒤에서 자전거 안장을 잡아줘도 계속 넘어집니다. 페달은 두 바퀴를 넘지 못합니다. 두 발짝 가다가 넘어지고, 세 발짝 가다가 기우뚱합니다. 아내는 속이 탑니다. ‘저러다 무릎이라도 까지면 어떡하나.’ 한참 씨름하다가 아이가 말하더군요. “엄마, 내가 할게!” 페달에 두 발도 못 올리면서 혼자 하겠답니다.

 아내와 저. 멀뚱멀뚱 얼굴을 쳐다봅니다. 멀찌감치 떨어져 벤치에 앉습니다. 아이는 혼자서 낑낑댑니다. 핸들도 꺾어보고, 페달을 손으로도 돌려보고, 브레이크도 잡아보고, 이리저리 시도하며 ‘고군분투’합니다. 쿵! 자전거가 넘어져도 그냥 둡니다. 아이는 혼자서 일어나 다시 안장에 앉습니다. 멀리서 쳐다봐도 빤히 보입니다. 나름대로 감을 잡으려고, 방법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쓰더군요.

 아내와 저는 한참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갑자기 아이가 소리칩니다. “엄마, 이것 좀 봐!” 보니까 자전거를 타고 10m가량 굴러갑니다. 넘어지려는 자전거를 후다닥 세우고서 저희를 쳐다봅니다. 아이의 표정이 대신 말합니다. ‘봤지? 나 혼자서 해냈어!’ 저희 생각보다 훨씬 빨리 타더군요.

 그날 밤, 아내가 말했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위해 뭘 해야 할지 오늘 조금 배운 것 같아.” 그게 뭘까요. ‘아이가 혼자 하게끔 맡겨 두고 기다려 주기’라고 합니다. “오늘 뒤에서 계속 잔소리하며 안장을 잡아줬으면 어땠을까. 아이가 혼자 힘으로 자전거를 조목조목 따져보는 과정은 없지 않았을까. 오히려 자전거를 더 늦게 배우지 않았을까.”

 사실 말처럼 쉽진 않습니다. 어린 자식에게 맡겨놓고 기다리는 일 말입니다. 왜냐고요? 불 보듯 뻔하니까요. 자전거가 넘어지고, 무릎이 까지고, 멍이 들 테니까요. 대부분 부모는 그걸 보며 가슴 아파합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생략하려 합니다. 훌쩍 건너뛰려 합니다. 아이가 치러야 할 고통과 시행착오를 빼려고 합니다.

 또 하나, 이유가 있습니다. 부모의 속이 타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어른 눈에는 답이 빤히 보이는데, 아이는 계속 맴돕니다. 부모는 그걸 참지 못합니다. 기다리다 못해 “답이 여기 있으니, 이 답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그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큰 착각 아닐까요. 우리 삶에는 ‘네 발 자전거’에서 ‘두 발 자전거’로 옮겨 타야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때마다 아이는 나름의 시행착오와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건 아이에게 큰 기회입니다. 왜냐고요? 고통과 시행착오. 아이는 그걸 통해 스스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풀면서 인생을 푸는 법을 배우니까요. 많은 부모가 아이에게서 그런 기회를 앗아갑니다. 아이를 위한다며, 부모의 마음이 아프다며 말입니다.

 가만히 짚어보세요. 자전거를 배우다가 넘어지는 아이. 부모는 그걸 ‘아픔의 풍경’으로 봐야 할까요, 아니면 ‘기쁨의 풍경’으로 봐야 할까요. 여기에 달렸습니다. 아이의 시행착오와 나름의 고통. 그걸 ‘아픔’으로만 보는 부모는 기다리지 못합니다. 끼어들고 방해하고 재촉합니다. 결국 아이는 스스로 성장할 시간과 기회를 상실하고 맙니다. 아이가 힘겨워하는 시행착오가 성장을 위한 ‘기쁜 풍경’임을 이해하는 부모는 다릅니다. 느긋하게 지켜보며 기다립니다. 우리는 과연 어느 쪽일까요.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부모일까요, 아니면 방해가 되는 부모일까요.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백성호의 현문우답] 내 아이, 제대로 된 물건 만드는 법

[백성호의 현문우답] 내 아이, 제대로 된 물건 만드는 법

[중앙일보] 입력 2014.10.04 00:29 / 수정 2014.10.04 03:38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풍경1 : 저녁 모임이었습니다. 한 증권사 부사장이 리더십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는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돼 있었다. 주로 자료를 복사하고, 심부름하고, 그 다음에는 문서 작업을 했다. 그런데 직책이 점점 올라갈수록 내가 필요로 하는 리더십이 바뀌더라.” 나중에 임원이 됐을 때는 곰곰이 짚어봤다고 합니다. 자신이 실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리더십이 어떤 건지. “그랬더니 놀라운 사실을 알겠더라. 위로 올라갈수록 내게 필요한 건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할 때 배운 게 아니었다. 회의할 때 부하 직원들과 소통하는 법,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는 법, 사업상 처음 만난 사람과 사귀는 법. 그런 게 가장 중요하더라. 그건 책상 앞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들과 놀고 어울리면서 익힌 것들이었다.”

 다들 놀랐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우리는 수시로 이런 말을 던집니다. “밖에 나가서 놀지만 말고, 책상에 앉아서 공부 좀 해! 제~발.” 돌아오는 길, 저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나중에 아이들이 독립해서 필요로 하는 힘은 뭘까. 그건 어떤 근육일까.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왼팔로만 매달리는 턱걸이를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입시라는 무게감에 부모가 먼저 겁을 먹고서. 사회에 나가면 오른팔의 근육도 필요하고, 두 다리의 근육도 필요하고, 배와 등의 근육도 필요한데 말입니다. 우선 입시부터 해결하자, 나머지는 대학 가서 다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핑계 반, 위안 반으로 위장한 채 말입니다.

 #풍경2 : 최재천(국립생태원장) 교수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의 교육 철학은 흥미로웠습니다. 한마디로 ‘방목’입니다. 무작정 풀어놓는 방목은 아니었습니다. 긴 끈의 한쪽 끝을 따뜻하게 잡고 있는 방목이었습니다. 최 교수는 아이들을 ‘제품’에 비유했습니다. “공장에서 기계로 마구 찍혀나오는 제품을 만들려면 기존의 방식으로 키워라. 그런데 정말 제대로 된 ‘물건’을 한번 만들어보려는 생각이 있다면 방목하라.” 그런 방목을 그는 ‘아름다운 방목’이라고 불렀습니다.

 생각해 봤습니다. 책상에서도 배울 건 많습니다. 들판에서도 배울 건 많습니다. 그럼 어떤 교육법이 가장 지혜로운 걸까요. 두 마리 양이 있습니다. 한 마리는 주로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합니다. 다른 한 마리는 목장이란 울타리 안에서 마음 가는 대로 뛰어다닙니다.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뭘까요. 저는 그게 ‘내 안에서 올라오는 물음에 스스로 답을 하게 하는가?’라고 봅니다.

 들판에서 친구와 놀고, 싸우고, 어울리면서도 숱한 물음이 자기 안에서 올라옵니다. 그게 무슨 물음일까요. 자신의 생활에서 부닥치는 문제들, 그걸 풀기 위한 물음들입니다. 친구가 화났을 때 어떻게 풀까, 전학 온 친구와 어떻게 사귈까, 사과를 할 때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이 모두가 결혼 생활, 직장 생활, 사회생활의 문제를 푸는 근육입니다. 그런 물음에 스스로 답할 때 아이들은 사회생활의 리더십을 미리 갖추게 됩니다. 울타리 안에서 자유로운 양이 울타리 밖에서도 자유로우니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부모의 안목이 참 중요합니다. 책상에 앉는 것도 중요하지만, 들판에서 뛰어다니는 것도 중요합니다. 과연 어느 쪽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증권사 부사장은 회사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책상의 리더십’이 아니라 ‘들판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최 교수는 “닭장에서 사육한 닭은 고기 맛이 퍽퍽하다. 반면 방목한 닭은 쫄깃쫄깃한 고기 맛이 끝내준다”고 하더군요. 아이들의 인생에서 책상의 근육이 전부일까요. 들판의 근육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내 아이를 ‘제대로 된 물건’으로 키우고 싶다면 더더욱 말입니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백성호의 현문우답] 통찰력 키우는 독서법

자료출처 : 중앙일보 http://joongang.joins.com/article/532/16151532.html?ctg=

 

“곰팡이가 핀 책이 아니라 명상에서 진리를 찾아라. 달을 보기 위해선 연못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라.”

 경전의 한 구절이냐고요? 페르시아의 오래된 속담입니다. 기나긴 세월 속에서도 이 속담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통하는 이치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너도 나도 ‘통찰력’을 찾습니다. 옛날에는 가진 정보가 많고, 가진 지식이 많으면 통찰력이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이제 웬만한 정보와 지식은 스마트폰 몇 번만 두드려도 얻을 수 있습니다. 정보의 양과 지식의 축적이 더이상 통찰력으로 직결되진 않습니다.

 그래서 다들 묻습니다. “대체 어디에서 통찰력을 키울 수 있을까?” “어떡해야 통찰의 눈을 가질 수 있을까?” 이 물음에 사람들이 주로 내놓는 답은 ‘책’입니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세상에 책만큼 생각을 키워주고, 안목을 넓혀주는 게 어디 있나?”

 저는 목숨을 건 듯이 책 읽는 사람도 여럿 만났습니다. 일주일에 한 권씩 읽는 사람도 있고, 1년에 100권을 읽는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가톨릭 신부님은 “지금껏 성경책만 1000번을 읽었다”고 하더군요. 참 어마어마한 독서량입니다.

 그런데 뜻밖입니다. 그렇게 책을 많이 읽는 이들도 통찰력은 제각각입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통찰력이 더 강한 것도, 책을 적게 읽는다고 통찰력이 더 약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 달에 열 권 읽는 사람보다 한 달에 한 권 읽는 사람의 통찰력이 더 번득일 때도 있더군요. 그래서 더 유심히 살폈습니다. 강한 통찰력의 소유자들. 그들은 대체 무엇이 다를까. 공통점이 있더군요. “어유, 내가 통찰력은 무슨…”하면서도 꼭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책을 많이 읽기보다, 책을 깊이 읽으려고 노력한다.”

 아하! 싶더군요. 창고에 오래 묵혀둔 책에서만 곰팡이가 피는 게 아니었습니다. 지금 손에 들고 내가 읽는 책에서 곰팡이가 필 수도 있더군요. ‘명상’이 생략된다면 말입니다. 좌선한 채 고요히 앉아 있는 게 명상이 아닙니다. 깊이 묻고, 깊이 생각하고, 깊이 궁리(窮理)하는 게 명상입니다.

 독서를 할 때는 책과 내 마음이 마주 앉습니다. 책에는 문고리가 있습니다. 온갖 정보와 지식, 저자의 경험이 담긴 창고를 여는 문입니다. 독자는 그걸 열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게 다는 아닙니다. 독서에는 또 하나의 문고리가 있습니다. 그건 책과 마주한 내 마음의 문고리입니다. 그 문고리는 책만 읽는다고 잡히진 않습니다. 책의 내용에 대해 깊이 묻고 궁리할 때 비로소 잡히는 문고리입니다.

 책에도 길이 있고, 내 마음에도 길이 있습니다. 책에 난 길을 걸을 때 ‘지식’이 쌓입니다. 내 마음에 난 길을 걸을 때 ‘지혜’가 생겨납니다. 책 속에 난 길도 걷고, 내 마음속 오솔길을 향해서도 깊숙이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에 ‘길 눈’이 생깁니다. 길을 보고, 길을 알고, 길을 내는 눈. 그게 통찰력입니다. 어찌 보면 “성경책을 1000번 읽었다”는 건 안타까운 고백입니다. ‘1000번을 읽어도 모르겠더라’는 절규가 깔려 있으니까요. 차라리 성경을 한 구절만 읽고, 거기에 대해서 1000번 묵상(명상)을 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럼 내 안에 성경을 보는 ‘길 눈’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페르시아 속담을 다시 읽어봅니다. ‘달을 찾으려면 연못이 아니라 하늘을 보라.’ 통찰력도 똑같습니다. 책에 나 있는 길만 따라가면 ‘지적인 사람’이 됩니다. 책에 난 길을 보며 내 마음에도 길을 낼 때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게 통찰력입니다. 우리의 삶을 헤쳐가는 ‘길 눈’입니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교육공감] ‘엄함’과 ‘억압’의 차이

[교육공감] ‘엄함’과 ‘억압’의 차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혐오와 가리킴이 아닌
사랑과 존중과 가르침
 

조벽 :  동국대 석좌교수
자료출처 : http://www.ktcunews.com/sub03/article.jsp?cid=16817

학생이 종이에 적은 글귀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학생이라는 죄로,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 공부라는 벌을 받아, 출석부란 죄수명단에 적혀, 교복이란 죄수복을 입고, 졸업이란 석방을 기다린다.” 오래 전부터 학생들 사이에서 나돌던 너무나 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제가 처음 직접 접했을 때에는 과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최근에는 고등학교 졸업식 날 학생들이 “출소자 여러분, 12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라고 적힌 피켓으로 축하해주거나 두부를 먹는 퍼포먼스를 하는 섬뜩한 모습까지 심심찮게 보게 되었습니다.

교실에서 학생들이 하나 같이 양손을 머리에 얹고 있는 모습을 본 적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학생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다음 지시 사항이 있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게 하기 위해서 시키는 행동이라고 합니다. 이 역시 초등학교 교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제가 처음 보았을 때에는 두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양손을 머리에 얹은 학생의 모습은 6·25 전쟁 당시 잡혀온 포로가 하던 모습과 너무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교사가 학생을 포로로 생각하거나 적으로 간주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양손을 머리에 얹은 학생의 모습에서 포로의 모습을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혹시 이러한 위력적인 비구어적 메시지를 수년간 받게 되면 학생이 스스로 죄인으로 생각하게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학교가 억압적인 감옥 같이 느껴졌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 학생과 적대적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해볼만 하겠습니다.

“꼼짝 말고 앉아서 공부해!” 참 많이도 들어본 흔한 말입니다. 집에서 엄마한테서 들었습니다. 요즘엔 인터넷에 “공부 잘하는 방법”이란 질문에 올려 진 답변이기도 합니다.

“찍소리 말고 하란대로 해라!” 이런 말도 흔하게 들립니다. 이런 말들은 제 귀에 매우 억압적으로 들려옵니다.

하지만 정작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본인이 ‘엄한 편’이라고 합니다. 과연 엄한 것과 억압적인 것이 같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엄한 것은 아이나 어른이나 모두가 지켜야 하는 규칙이나 행해야 하는 행동의 규범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 규칙과 규범을 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허락된 테두리에서 벗어나면 지적하고 책임을 추궁하는 게 엄한 것입니다. 하지만 테두리 내에서는 상당한 자율권이 보장됩니다.

그래서 엄함에는 아이를 존중해주고 책임감과 판단력 있는 성숙한 존재로 키워주고 싶은 진정한 관심과 돌봄이 깃들어 있습니다.
반면, 억압적인 경우에는 아이가 지켜야 하는 규칙이 바로 어른들 자체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새로운 규칙이 생겨납니다. 충분한 예고 없이 발표되고, 명쾌한 설명 없이 적용됩니다. 존재하는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가 갑자기 지적을 당합니다. 그래서 걸리는 놈이 재수 없는 놈이고 걸릴 때는 그저 억울합니다.

어른들은 다 타당한 이유가 있으니까 규칙을 만들었고 유연하게 적용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 이유가 소통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아이들이 납득을 할 수 없다면, 아이들은 그저 어른이 시키는 것을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노예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적절하고 부적절한지 판단력을 연습해볼 기회를 박탈당한 것입니다.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하기는 글렀습니다.

엄함과 억압은 얼핏 보면 비슷해 보입니다. 법과 규칙이 존재한다는 게 같고 위반 시 벌을 준다는 것이 같습니다. 그래서 쉽게 혼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둘은 확연히 다릅니다.

엄함에는 사랑과 존중과 가르침이 있습니다. 억압에는 혐오와 멸시와 가리킴만 있습니다. 엄함에 배움이 있고 인재를 탄생시킵니다. 억압은 증오를 대물림할 뿐입니다. 엄함은 가정과 학교의 생활방식입니다. 억압은 교도소의 방식입니다. 학교와 가정은 아이에게 엄한 곳이어야 합니다. 어른은 아이에게 엄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청소도 기본교육이다. 총채 든 남자, 걸레 든 아이



[강홍준의 줌마저씨 敎육 공感] 총채 든 남자, 걸레 든 아이

[중앙일보] 입력 2014.03.24 00:13 / 수정 2014.03.24
00:18





강홍준 논설위원
 

얼마 전 이사 갈 집에 미리 가 아이의
옷장이 들어갈 수 있는지 치수를 잰 적이 있다. 주인 허락을 받고 그 집 딸아이가 쓰는 방에 들어가긴 했다. 방 구석구석에 머리카락이 뭉쳐져
굴러다녔고 도처에 속옷이 깔려 있어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그 집으로 이사 갈 생각이 똑
떨어졌다.

 사실 남의 일이 아닐 수 있다. “대체 넌 치울 줄도 모르느냐”라는 부모의 아우성이 나오지 않는 집이 있을까 싶다.
전날 밤 먹고 자기 책상에 고스란히 놔둔 접시, 컵, 과자 봉지…. 그런데 따져보자. 요즘 청소, 누가 하나. 학생들은 학교에 가서도 좀처럼
청소하지 않는다. 학교가 용역을 써서 학교 청소를 시키고 있다. 오히려 학교에서 청소는 벌이다. 교복을 입고 오지 않았다고, 과제물을 하지
않았다고 내리는 벌 말이다.

 이처럼 학교 현장에서 청소는 부정적으로 읽힌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요즘 젊은
부부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40대 이상 부부가 사는 가정에서 청소는 엄마의 몫이다. 청소기가 소음을 내며 오가는 도중에 아빠가 하는 일이란 소파에
앉아 두 발을 드는 게 고작인 가정들도 많은 것 같다. 심지어 청소할 시간에 하나라도 더 공부하라고 가르치는 부모까지 있으니 좀처럼 치울 줄
모르는 아이는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다.

 청소는 내가 사는 공간에 일정 기간 동안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행위다. 타조털로 된
총채를 들고 책장 구석구석, 선반 위, 심지어 방 문짝 위에 쌓여 있는 먼지를 털어낸다. 의외로 많은 곳에 숨겨진 먼지가 있다. 진공청소기로 그
먼지를 빨아들인다. 침대 밑 공간에도 비스듬히 청소기를 넣어 숨은 먼지를 제거한다. 그런 다음 젖은 걸레를 가지고 구석구석 닦아낸다. 변기에
끼어 있는 때를 닦아내고, 화장실 바닥을 솔로 살살 문질러 생활의 때를 벗겨낸다. 청소는 이처럼 나로 인해 생겨난 생활의 때를 벗겨내는 종결
행위이자 새로운 한 주를 청정하게 맞이하는 시작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의 초·중·고교가 청소라는 행위를 부정적 의미로 가르치고 있는 이상 가정에서라도 부모가
이를 제대로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를 위해 매주 한 차례 시간을 정해 온 가족이 대청소를 하는 건 어떨까. 아빠는 먼지떨이를 들고 한
주간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아이는 최소한 자기가 머물고 있는 공간만이라도 쓸고, 닦게 하는 것이다. 손은 그냥 둔 채 머리 회전만 요구하는
교육은 기본이 덜 된 교육이다.

강홍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