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의지에 따라 학생의 삶은 차이가 나고 학생을 가르치는 행위는 “예술(art) 만큼 신성하다. “
[카테고리:] 지혜의말(촌철활인)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다
말 안 듣는 자식에게 고민하던 부모가 망치와 못을 주었다.
힘들면 마음 껏 못을 박아라…
신이난 아들은 화가 날 때마다 못을 박았다.
아들은 못을 다 박았더니 이제 심심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빠가 이번엔 못을 뽑으라고 했다. 아들은 못을 열심히 뽑았다.
못을 뽑고 나니 웬지 벽이 보기에 흉했다.
그래서 벽에 스티커를 붙이고 아버지에게 아버지 벽이 보기 흉해요 라고 말했다.
이때 아버지는 다른 말은 안하고 이렇게 말했다.
네 아버지 가슴은 그 벽보다 훨씬 더 많은 흉터가 남아 있단다.
네 아버지 가슴에 못좀 그만 박아라.
네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았으니 네 아버지 가슴은 어떻겠니?
갈등의 종류와 해법(세종시 문제를 통해서)
혹시 이 글이 수많은 논란에 그저 그런 주장 하나를 더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치사회학 연구자로서 한 번은 발언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세종시 문제’다. 세종시 논란은 지난주 월요일 정부가 수정안을 발표함으로써 이제 정점에 도달했다. 세종시 문제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정치적·정책적 쟁점이 혼재돼 있고, 중앙과 지방 간 갈등이라는 또 다른 쟁점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건 사회갈등은 두 가지로 나눠진다. ‘이익갈등’과 ‘가치관갈등’이 그것이다. 노사갈등처럼 서로 다른 경제적 이익이 맞서는 게 이익갈등이라면, 환경갈등처럼 서로 다른 가치관 및 세계관이 충돌하는 게 가치관갈등이다. 세종시 논란에는 개발 이익에 따른 이익갈등과 국가의 미래에 관한 가치관갈등이 결합돼 있다. 이익이 엇갈리고 가치관이 충돌하는 ‘복합갈등’이기 때문에 그만큼 문제 해법을 찾기 어렵다.
복합갈등 측면에서 세종시 문제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관점이 공존한다. 단순화를 무릅쓰고 그것들을 나는 이렇게 이름 짓고 싶다. 첫째는 세종시의 경제학이다. 이 관점은 무엇보다 국정의 비효율성을 주목한다. 9부2처2청을 옮길 경우 행정의 효율성이 감소될 수밖에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하다는 논리다. 경제적 효율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이 관점은 이명박 대통령의 경제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세종시의 정치학이다. 이 관점은 무엇보다 정치적 원칙과 신뢰를 우선시한다. 2005년 국회에서 여야가 숱한 논의 끝에 결정한 만큼 국민과의 신뢰가 우선시돼야 한다는 논리다. 국민과의 약속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이 관점은 박근혜 전 대표의 정치학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셋째는 세종시의 사회학이다. 이 관점은 무엇보다 국토의 균형발전을 강조한다. 중앙과 지방 간의 균형발전을 위해 수도권 집중은 완화돼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행정부처 이전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전체 사회의 균형발전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이 관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회학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세종시 논란이 뜨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가치관갈등의 관점에서 국정의 효율성, 원칙과 신뢰, 국토 균형발전이 충돌하고 있다면 이익갈등의 관점에서는 원안이든 수정안이든 수도권과 충청권, 충청권과 다른 지방권 간 차별 및 역차별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더욱이 정치적으로 세종시 논란에는 ‘과거 권력’, ‘현재 권력’, ‘미래 권력’ 간의 미묘한 갈등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그 긴장이 더해지고 있다. 정책적 사안이 정치적 전략과 결합함으로써 복잡한 셈법이 등장하고, 이 셈법은 다가온 6월 지방선거는 물론 2년 뒤에 치러질 총선과 대선에서도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나 역시 이 복잡다단한 퍼즐을 풀 묘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노무현의 사회학, 이명박의 경제학, 박근혜의 정치학 가운데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모범 답안은 없다는 사실이다. 균형발전의 가치를 누가 훼손할 수 있고, 국정의 효율성을 누가 거부할 수 있으며, 정치적 원칙과 신뢰를 누가 부정할 수 있는가. 어쩌면 지금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서 역지사지(易地思之)해 봐야 할 지점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문제가 제기된 만큼 토론은 충분히 하되 갈등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최종 합의를 이끌어 낼 필요가 있다.
일부 부처의 이전을 제안하는 일각의 절충론이 최선의 해법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내가 강조하려는 바는 무릇 많은 사회갈등이 그러하듯 여러 기준을 고려해 합리적 선택을 취하는 것 이외의 다른 대안은 없다는 점이다. 먼저 자신의 견해부터 밝히자면, 세종시 문제만은 경제학적 관점보다는 정치학적·사회학적 관점이 우선시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 역시 나의 판단일 뿐 다른 이들에게 강제할 수는 없다.
세종시의 미래는 국민투표에 회부하지 않는 한 결국 국회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종시 문제의 해결은 우리 사회에서 정치가 왜 존재하고 필요한 것인가를 증거할 기회일 수도 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의사결정권을 행사하는 국회의원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정략적 시각에서 세종시 문제를 바라보지 말자. 대한민국의 진정한 백년대계를 고려하자. 무엇보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기본을 다시 한번 숙고하자. 이익과 이념을 떠나 진심으로 부탁하고 싶은 바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리더와 보스-리더십
리더와 보스
<리더와 보스>(홍사중 지음)라는 책은 다음과 같이 두 유형의 지도자를 구별하고 있다.*
보스는 사람들을 몰고 간다. 리더는 그들을 이끌고 간다.
보스는 권위에 의존한다. 리더는 선의(善意)에 의존한다.
보스는 회초리를 필요로 한다. 리더는 회초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보스는 ‘나’라고 말한다. 리더는 ‘우리’라고 말한다.
보스는 “가라.”고 말한다. 리더는 “가자.”고 말한다.
보스는 등뒤에서 민다. 리더는 앞에서 나아간다.
보스는 감춘다. 리더는 공개한다.
보스는 믿지 않는다. 리더는 믿는다.
보스는 겁을 준다. 리더는 희망을 준다.
보스는 복종을 요구한다. 리더는 존경을 받는다.
보스는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본다. 리더는 대중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보스는 자기의 약점을 숨긴다. 리더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권위를 갖는다.
보스는 의견이 다른 사람을 미워한다. 리더는 의견이 다른 사람을 가까이한다.
보스는 권력을 쌓는다. 리더는 권위를 쌓는다.
보스는 타협을 모른다. 리더는 타협할 줄 안다.
보스는 “예스”라는 말을 듣는 귀 하나뿐이다. 리더는 “노”라는 말을 듣는 귀까지 포함하여 귀가 두 개다.
보스는 누가 잘못하고 있는지를 지적한다. 리더는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를 지적한다.
보스는 자기 말까지도 무시할 때가 있다. 리더는 자기 말에 책임을 진다.
보스는 부하를 만든다. 리더는 지지자를 만든다.
보스는 권력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리더는 권력을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보스는 후계에게 짐을 남긴다. 리더는 짐을 덜어준다.
보스는 뒤에서 호령한다. 리더는 앞에서 이끈다.
* “리더의 아침을 여는 책” 김정빈/동쪽나라에서 인용한 글은 원저의 것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필자가 약간 가감윤색한 것이다.
아이젠하워 장군이 책상 위에 끈을 놓고 부하 장군에게 말하였다.
“이것을 밀어보라.”
부하 장군이 밀었지만 끈은 잘 나가지 않았다.
아이젠하워 장군이 끈을 앞에서 당기면서 말하였다.
“지도자는 이렇게 앞에서 이끌어야 한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가 남미의 인디오 추장 일행을 만났을 때 추장에게 물어보았다.
“추장님, 당신의 특권은 무엇입니까?”
추장이 대답하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장 앞에 서는 것입니다.”
지금은 민주시대이고, 민주시대는 리더를 원한다. 보스는 전근대적인 왕조시대의 지도자상일 뿐이다.
민주시대가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게게는 전근대적이고 봉건주의 의식이 남아 있다. 그것은 리더에게도 그러하고 추종자들에게도 그러하다. 내 속의 봉건 잔재부터 치우지 않는 한 우리게에 미래는 없다. 있다면 과거 회귀의 구차하고 답답한 미래뿐일 것이다.
말의 맛
유근 군의 말에는 듣는 사람을 끝까지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 적절한 비유에서 시작해 철저한 논리로 마무리 된다.
[과학 칼럼] 과학의 본질

[과학 칼럼] 과학의 본질 [중앙일보]
2009.10.29 00:22 입력
근대 이후 급속도로 발달한 과학과 기술은 우리 인간이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풍요와 함께 새로운 문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과학의 발전 속도는 최근 너무나도 빨라져 과학자들 중에서도 모든 분야의 새로운 지식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과학 발전의 원동력은 관측과 실험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인간이 경험으로 얻은 사실과 결과들이다. 간혹 사람들이 사실과 이론의 차이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자와 달리 후자는 바뀔 수 있다. 행성들이 태양을 타원 형태로 돈다는 관측 결과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만유인력의 법칙이 20세기에 들어와 새로운 관측 결과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던 시점에 상대성이론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바다. 어쩌면 이론은 그 이전까지의 사실들을 설명하는 체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둘의 차이에 대해서는 미국의 고생물학자 스티븐 굴드가 명쾌한 비유를 해 준 바 있다.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사실에 대해 뉴턴의 주장이 맞느냐 아니면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맞느냐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으나 사과는 둘 중 어느 것이 맞느냐를 기다렸다가 떨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면 우리는 먼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을 세운다. 가설이 이론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실험과 관측 결과들이 거기에 부합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정확한 관측이라도 오차가 있기 마련이다. 또한 관측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제한돼 있다. 아무리 지구 내부를 잘 알고자 해도 지구 중심까지 파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오차를 고려하고서라도 보편적인 현상과 사실을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이론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아무리 잘 맞아떨어지던 이론이라도 어느 날 무시할 수 없는 심각한 예외가 발견되면 불가피하게 수정되거나 때로는 완전히 바뀌기도 한다. 이처럼 이론은 철저히 그 당시까지 알려진 사실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나는 가끔 우스갯소리로 학생들에게 과학자와 변호사의 차이가 뭐냐고 묻는다. 둘 다 논리적으로 자기의 뜻을 펼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러나 변호사의 경우 결론을 먼저 정해놓고 거기에 맞는 증거들을 찾아가는 반면 과학자의 경우 증거를 토대로 결론을 끌어낸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래서 과학의 경우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면 결론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또 설령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문제이더라도 계속적인 증거 찾기 노력을 통해 확인을 하고 또 확인을 해야 하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많은 문제가 제기되고 이로 인해 집단마다 자기 이해에 맞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서로 그럴싸한 주장을 하면서 상대방이 먼저 한발 물러서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겉으로는 마음을 비우자고 하면서 상대방이 먼저 비우기를 기다렸다가 자신의 생각을 그 빈 곳에 채우려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진정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앞서 결론을 세우고 거기에 맞는 사실들을 끼워 맞추기보다 객관적인 증거들을 바탕으로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학자적인 접근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묵 서울대 교수·지구환경과학부
홍명보의 통로의 리더십
중앙일보 2009.10 . 14.
대학교 3학년 홍명보에겐 ‘우상’이 있었다. 이탈리아 빗장 수비의 간판이었던 프랑코 바레시다. 이유는 하나. 바레시의 “영리한 플레이가 좋아서”였다. 홍명보는 그를 독일 축구의 전설적인 리베로 베켄바우어에 견줬다. 홍명보는 바레시를 ‘축구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았다.
그런 나침반을 안고 홍명보는 달렸다. 결국 명선수가 됐고, 다시 명감독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유명한 선수도 없었다며? 그런데 어떻게 20세 이하 세계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 8강까지 올랐지?” “카메룬전에서 패했을 때는 주전을 5명이나 교체했다며?” “홍명보는 선수 때도 잘하고 감독 때도 잘하네. 비결이 뭐지?” 그래서 궁금해진다. 홍명보 선수가 말한 ‘영리한 플레이’의 핵심이 뭘까. 그 나침반의 정체는 뭘까.
#풍경1 : 2002년 월드컵 때 홍명보 선수에게 누군가 물었다. “히딩크 감독과 국내 감독들의 차이점이 뭔가?”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하프 타임 때 국내 감독들은 부족한 선수를 향해 질타를 한다. 눈물이 찔끔 나도록 말이다. 히딩크 감독은 그러지 않았다. 개인이 아닌 팀 전체에 대해 지적했다. 그렇게만 해도 국가대표 선수는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프 타임 때 질타를 당한 선수는 후반전에서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풍경2 : 이번 대회에서 홍명보 감독은 스무 살 안팎의 젊은 선수들에게 존댓말을 썼다. 호칭도 “여러분”이라고 불렀다. 한국 축구계를 아는 사람들은 “충격이자 파격”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홍명보의 존댓말’에는 깊디 깊은 이유가 있다. 그가 궁극적으로 끄집어내고자 한 건 ‘단순한 존중’이 아니었다. 그 존중 너머에서 꿈틀대는 에너지였다. 강압적 지시에 의한 기계적 움직임이 아니라 선수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창조적인 에너지였다.
#풍경3 : 홍명보 감독은 주전과 비주전 간 경계를 허물었다. 청소년대표팀에는 영원한 주전도 없었고, 영원한 비주전도 없었다. 그렇게 ‘홍명보 호’는 경쟁에 대해 열려 있었다. 그건 기회에 대한 열림이었다. 그 기회 앞에서 ‘내 안의 에너지’를 아끼는 선수는 없었다.
리더십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통로의 리더십’이고, 또 하나는 ‘장벽의 리더십’이다. 진정한 리더십이란 뭔가. 구성원이 자기 안의 에너지를 마음껏 끄집어 내고, 마음껏 쓸 수 있게 하는 ‘온전한 통로’가 되는 거다. 그게 바로 통로의 리더십이다. 잠자는 에너지는 깨워주고, 깨어난 에너지는 격려하고, 달리는 에너지엔 길을 터주는 거다. 그런데 오히려 선수들의 에너지를 가두고, 식히고, 짓누른다면 장벽의 리더십이 되고 만다.
홍명보 감독의 나침반은 ‘생각하는 축구’ ‘창조적인 축구’다. 대학생 홍명보가 반했던 바레시의 영리한 플레이, 그 뿌리도 실은 창조성(creativity)이다. 홍 감독의 리더십은 철저하게 그걸 위한 통로다. 그래서 ‘선수 홍명보’ 못지않게 ‘감독 홍명보’가 기대된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과학 칼럼]과학에 대한 오해 -연역법과 귀납법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가 과학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알거나 스스로 안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는 시각이다. 심지어 과학자 중 종교에 회의적인 사람이 있으면 조금 아는 자의 오만으로 보거나 ‘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믿는 편협한 사람으로 치부하기도 하고, 반대로 과학자가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 그의 믿음을 남다르게 보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과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과학자란 무엇을 안다기보다 왜 우리가 그것을 안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해 근간이 되는 과거의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신념과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가운데 지식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고 듣고 한 것을 원인과 결과라는 논리적인 틀에 끼워 맞추어 놓은 경험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지식은 관측과 실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람들은 한번 얻어진 지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모든 지식은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실험과 관측에는 늘 오차가 있고 또 그 자체가 시간적·공간적으로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기술에 의해 더 나은 실험이나 더 많은 관측이 이뤄지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바가 수정되기도 하고 때로는 완전히 바뀌기도 한다.
과학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역법과 귀납법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연역법이 주로 사용되는 분야는 수학인데 이는 삼단논법을 생각하면 된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연역법이 복잡한 자연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일찍이 간파했다. 한 예로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나폴레옹은 인간이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이성적이다’고 했을 경우 이렇게 얻은 결론이 반드시 옳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으로써 베이컨이 제안한 것은 실험과 관측에 바탕을 둔 귀납법이다. 예를 들어 모르는 상자가 있다고 치자. 그리고 거기에 1이라는 숫자를 넣었더니 2가 되어 나왔고, 또 2라는 숫자를 넣었더니 4가 되어 나왔다고 하자. 이러한 일련의 실험을 통해 우리는 그 상자가 무엇을 두 배로 만드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더 많은 실험을 통해 예상한 결과가 나온다면 우리의 확신은 더 강해지겠지만 단 한번이라도 예외가 생기면 당초의 생각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베이컨은 이처럼 실험과 관측을 통해서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창했고 이러한 귀납적 방법에 의한 탐구가 근대 과학의 출발점이 됐다.
계몽주의 시대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인간의 물질적 삶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그 결과 과학을 절대 가치로 여기며 모든 문제를 과학으로 해결하려고도 한다. 하지만 과학은 우리가 알고자 하는 모든 것을 명쾌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지, 과연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는지 등 정작 우리가 알고자 하는 사안에 대해 아무런 답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학에 대해 실망을 하고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으려 하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 지식의 한계이지 과학적 사고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비록 제한적이지만 우리 인간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여전히 면밀한 관찰과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서뿐이다.
이상묵 서울대 교수·지구환경과학부 (중앙일보 2009. 10. 08)
행복의 조건-중앙일보 분수대
히말라야 산맥 동쪽 끝에 자리잡은 부탄은 인구 70만 명의 작은 왕국이다. 면적은 남한의 절반이 채 안 되고, 1인당 국민소득도 1400달러로 세계 124위다. 수도 팀부의 인구는 우리로 치면 군 소재지 정도인 3만 명이고, 백화점도 전국을 통틀어 두 개뿐이다. TV는 1999년, 인터넷은 2000년에야 들어왔다.
하지만 이 나라는 2006년 영국 레스터대학이 작성한 ‘세계 행복지도’에서 여덟 번째로 행복한 나라로 꼽혔다. 한국은 102위였다. 부탄인들이 낮은 소득에도 불구하고 큰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전임 국왕인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가 1972년 ‘국민총행복(GNH·Gross National Happiness)’이란 개념을 도입한 덕분이다. 경제개발을 앞세우기보다는 전통문화와 환경을 보호하고, 부를 공평하게 분배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겉으로 드러난 부(富)보다는 내적인 만족감을 중시한 것이다.
유럽의 덴마크는 최근 20년간 각종 행복지수 조사에서 거의 1위를 독차지하고 있다. 덴마크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의 바탕에는 ‘평등과 신뢰’가 깔려 있다. 다들 비슷하게 벌고 소비하면서 범죄 걱정 없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행복학자들은 소득과 행복이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1인당 소득이 1만2000달러(1400만원)를 넘어서면 소득이 늘어나는 만큼 삶의 만족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삶의 여유, 원만한 인간관계, 건강, 정신적 몰입을 행복의 필수조건으로 들기도 한다. 하지만 행복감이란 날씨에 따라 달라지고, 방금 어떤 영화를 보고 나왔는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월드컵 축구 우승이라도 했다면 국민 전체의 행복감은 순식간에 올라간다.
최근 한국사회학회가 주최한 ‘행복 심포지엄’에서 한국인은 돈보다 화목한 가정과 건강을 행복의 최대 요인으로 꼽는다는 내용이 발표됐다. 한국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더 많이 일하지만 가족과 사이가 멀어지지나 않을까, 건강을 잃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는 것이다. 명절이면 먼 길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모두들 귀성에 나서는 것도 가족 사랑을 확인하고, 거기서 행복을 찾기 위함일 것이다.
독일의 괴테는 “인생을 통틀어 정말 즐거운 시간이 4주도 안 된다”고 했고, 비스마르크도 “행복한 순간은 24시간이 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행복은 스스로 찾아 나서고 더 많이 느끼려 노력할 때 늘어난다는 얘기다.
강찬수 환경전문기자
조직에서 생존하기 위한 친화력…..좋은 성격!
사회인으로서 갖춰야 할 여러 덕목 중에 ‘친화력’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아래에 있을 때는 윗사람을 잘 만나야 하고 무조건 따르고 잘 배워야 한다. 따지고 비판하고 험담하고, 그것이 습관 되면 버림받는다. 한마디로 “성공은 좋은 성격이 8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성격이란? “남 험담할 줄 모르고, 여기저기 끼는 데는 많지만 자기주장을 크게 펴지 않으며, 어느 조직에서도 리더가 되지는 않으나 리더가 함께 일하고 싶어하는 일순위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