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에 충실한 일본의 여름방학 [중앙일보]

[글로벌 아이] ‘방학’에 충실한 일본의 여름방학 [중앙일보]

[기고] 스마트폰에 보이는 1% 교육의 벽

[기고] 스마트폰에 보이는 1% 교육의 벽

  • 한준상 연세대 교수·교육학 (조선일보)
  • 아이폰(I-Phone)은 이제 교실 속으로도 파고들고 있다. 트위터라는 지원군을 업고 아이폰은 이제 수업의 도구로까지 쓰인다. 강의나 학습의 혁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아이폰에는 좋은 부품을 모아놓은 것, 그 이상의 느낌이 가득하다. 설계 초기부터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고 만든 물건, 서양의 장인(匠人)들이 품고 있는 창발적인 예술 감각이 서려 있다 해도 좋을 만한 물건이다.

    아이폰의 디자인에는 스티브 잡스가 티베트에서 구도(求道)하면서 고승들에게서 얻어내려고 했던 그 예술적인 혼이 깃들어 있다. 저들은 그것을 절대적인 창조력을 위한 배움의 미학이라고 부른다. 저들에게 배운다는 것은 삶을 노래하는 것이고, 배운다는 것은 새로움을 창조해내는 것이고,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단련한다는 말인데, 아이폰에는 그 배움의 정신이 가득하다.

    디스플레이는 한국의 회사에서 사고, 배터리와 CPU는 다른 한국 회사 제품을 사용하고, 조립은 대만에서 하는 식으로 제품의 완성도를 높여간 것도 구도의 증좌처럼 보인다. 사실 아이폰을 만드는 회사는 애플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처음부터 만들어 내려고 한 원초적인 ‘그 무엇’, 그 욕망이 있었기에 애플사만이 모든 찬사를 가져갈 수 있었다. 부품비라고 해야 기껏해서 171달러 남짓이다. 소비자들은 그 전화기를 800달러의 고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다. 싱글벙글, 웃음도 감추지 못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번에는 제대로 산 것 같다’는 자긍심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업들도 세계 시장에 도전자들을 내놓았다. 아이폰의 대항마로서 만들어 낸 최첨단 제품이다. 사람들은 아이폰과 이 도전자들을 양손에 쥐고 이모저모 살펴본다. 일단 작동시켜 보면 만든 사람의 발상과 능력, 재주, 장난기까지 읽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스마트폰의 기능이 훌륭하기는 저들 제품 그 이상이다. 화질도 압도적이고 터치 역시 예전과 사뭇 다르다. 정말로 이번에는 ‘국산’ 같지 않은 제품들이다. 최첨단 기술이 융합돼 있기에 더욱더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최고의 소재들을 모아놓은 제품인데도 무엇인가 허전한 것이 있다. 나 한 사람만의 편견이 아니라, 꽤 안다는 여러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한다. 아이폰을 넘어서려는 몸부림도 이해할 만하고, 애끓은 머리 부림에도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영원히 각인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생각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 아쉬운 흔적은 바로 한국 교육의 효과가 남긴 앙금일 수 있다. 좋은 것이라면 다 해보고, 좋은 방법이라면 모조리 대입(代入)시켜본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 제품’이 바로 한국 학교 교육이다. 얼떨결에 오바마 대통령의 찬사도 들은 교육이다. 세계적인 휴대전화와 텔레비전, 자동차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한국 학교 교육이다. 그러나 베끼기 달인(達人)의 교육이었다. 그 생래적 한계는 극복되지 않고 있다.

    한국의 학교 교육은 분명히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일 뿐이다. ‘우수하다’는 점수는 받을 수 있지만, 감탄을 불러내지는 못한다. 1% 모자라는 한계 때문이다. 서양인들은 우리 교육에 부족한 그 1%를 ‘배움의 벽’이라고 부른다. 그 1%를 채워야만 벽을 넘어설 수 있다. 늦은 것은 아니다.

어느 초교 여교사에게 생긴 일

[조선데스크] 어느 초교 여교사에게 생긴 일

 

김민철 사회정책부 차장대우

초보 여교사가 있었다. 서울 초등학교 5학년을 맡은 이 교사는 3~4년차 교사 특유의 열정과 사랑으로 가르쳤다. 말썽 부리는 학생이 있으면 손을 꼭 잡고 타일렀다.

지난해 5월 수업시간에 한 남학생이 과자를 꺼냈다. “나중에 먹으라”고 해도 듣지 않자 과자를 빼앗았다. 학생은 갑자기 “먹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반말하며 교사를 때리기 시작했다. “우리 선생님 죽어요”라는 말을 듣고 옆반 여교사가 달려왔지만 힘을 당하지 못했고, 남자 교사가 와서야 겨우 사태가 진정됐다. 여교사는 우울증으로 휴직하고 6개월 동안 병원을 다녔다.

지난해 서울 A고 남학생의 여교사 성희롱 동영상 유포, 경기도 의정부 중학교에서 학생이 여교사의 머리채를 잡고 폭행한 사건 등이 보도됐다. 두 사건은 그래도 중·고교에서 발생했다. 그런데 학생들은 빨리 성숙하고 여교사 비율은 해마다 높아져 초등학교에서도 교사가 폭행·폭언을 당하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고 한다.

지난 5월 교총이 발표한 2009년 교권침해사건 중에는 이런 사례도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휴대폰을 크게 틀어놓고 수업을 방해해 담임이 휴대폰을 압수하자 학생은 ‘×××아! 남의 휴대폰 왜 가져가? 내놔! ×××아!’라고 욕하면서 담임의 팔·가슴을 의자로 폭행해 옆 반 교사가 겨우 진정시킴.”

교총은 지난해 학생·학부모에 의한 초·중·고 교사 폭행·폭언 사례를 108건으로 집계했는데, 이는 빙산의 일각이고 상당수 교사가 폭행을 당하고도 학교의 무마로, 또는 스스로 너무 창피해 쉬쉬하고 넘어가고 있다고 교사들은 전했다. 해마다 연초 초등학교에서는 5~6학년을 맡지 않으려는 교사들과 학교가 승강이를 벌인다. 꼭 수모를 당하지 않더라도 덩치 큰 5~6학년이 눈을 흘기며 “왜 나한테만 그러는데요”라고 반항하면 위압감을 넘어 겁이 난다는 것이 여교사들의 얘기다.

문제는 초등학교는 학생들을 징계할 수단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의무교육인 초등학교에서는 큰 잘못을 저질러도 정학이나 퇴학 처분을 할 수 없다. 몇몇 초등학교 ‘학교생활규정’을 보니 징계는 학교 내 봉사, 사회봉사, 특별교육 이수밖에 없었다. 한 교사는 “지금 학교 제도는 교사들에게 무조건 사랑으로 가르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한 경우가 너무 많다”고 말했다.

학생인권도 중요하지만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고, 잘못에는 징계가 따른다는 점도 배워야 하는데, 초등학교의 경우 반성문 쓰게 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어느 초등학교에서는 구타한 학생을 겨우 설득해 반성문을 쓰게 했더니 ‘병원으로 보낼 수 있었는데…’라고 써서 교사들을 경악하게 했다. 현실성 있는 가장 강한 처벌은 전학을 보내는 것이지만 학부모가 반대하면 불가능하다.

요즘 진보 성향의 교육감들은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얼마 전 교총이 실시한 조사에서는 일선 교원 10명 중 7명 이상이 ‘학교 생활지도의 어려움’을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면서 93.4%는 ‘학교 질서와 기강이 무너졌다’는 데 동의했다.

자기 자식이 최소한의 윤리도 무너진 학교에 다니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초보 여교사 사연을 들으면서 학생인권조례 논의도 필요하겠지만 교권(敎權)조례, 현실성 있는 학생 징계 방안도 함께 논의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앙시평] 대학을 생각한다 (이 글을 교육 또는 학교를 생각한다로 바꾸면 어떨까?????)

그동안 칼럼을 쓰면서 자제해 온 것 가운데 하나는 대학에 대한 발언이다. 누구나 그렇듯 자신이 몸담은 조직에 대해 객관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따라서 발언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근 일련의 사건은 대학 현실을 돌아보고 그 앞날을 고민하게 한다.

내 시선을 잡아 끈 사건은 세 가지다. 첫째, 얼마 전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며 고려대를 자퇴한 김예슬씨의 경우다. “대학에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고, 불의에 대한 저항을 꿈꿀 수도 없었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학생을 가르치는 걸 직업으로 삼은 나로서는 그녀의 용기를 마음 놓고 칭찬할 수도 없었지만 “우정도 낭만도 사제 간의 믿음도 찾을 수 없었다”는 그녀의 비판을 철없는 객기로만 생각하는 것은 내가 공부해 온 사회학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를 정말 가슴 아프게 한 것은 온라인매체 프레시안에 실린 한 고등학교 검정고시 졸업자의 발언이다. “그녀가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그놈의 대학에 그렇게 가고 싶습니다”는 그의 말은 마음을 서늘하게 했다. 그래도 김예슬씨는 무한경쟁의 트랙에서 앞서 달려가던 친구였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불평등사회라 하더라도 개인의 능력에 따른 계층이동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10대 후반 한번 획득한 문화자본인 학벌은 패자부활전을 사실상 허용하지 않는다.

둘째, 중앙대 사건 또한 그대로 지나치기 어렵다. 최근 중앙대는 실용학문 중심의 학제 개편을 추진함으로써 상당한 학내 진통을 겪고 있다. 며칠 전엔 학생 2명이 한강대교에 올라가 고공시위를 벌였다. 우리 대학이 시험을 위해 스펙 쌓기에만 급급한 그런 학교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한 학생의 절규는 마음을 시리게 했다. 그 학생의 주장이 다수 의견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학의 본령은 다수든 소수든 다원적 가치를 존중하는 데 있지 않는가.

셋째, 얼마 전 연합뉴스 모 기자와 ‘자발적 아웃사이더’의 대학문화에 대해 통화한 적이 있었다. 옆에 있던 조교에게 요즘 학생들은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하는 것 같다고 하니 조교의 답변이 의미심장했다. 불안해서란다. 도서관을 벗어나면 다른 학생들에게 뒤처지는 것 같아 가능한 한 도서관에 머문다고 한다. 자발성은 불안감의 또 다른 이름이며, 이 불안이 캠퍼스 곳곳에 떠돌고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 세대가 ‘퇴출의 공포’를 안고 산다면, 자녀 세대는 ‘진입의 불안’ 앞에 서성거리는 게 대학 사회의 정직한 자화상이다.

시선을 잠시 밖으로 돌려보면, 이런 풍경이 물론 우리 사회만의 것은 아니다. 5년간 공부했던 독일대학의 경우 최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구조개혁을 추진해 왔다. 자본주의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던 독일 대학의 평준화가 무너지는 걸 보고 신자유주의가 정말 세긴 세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2년간 연구했던 미국 대학은 본래 경쟁에 익숙한 제도를 갖고 있었지만, 최근엔 더욱 경쟁력을 배가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오늘날 대학의 경쟁력 강화는 사실 지구적 추세다. 하지만 미국과 독일 대학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인문학을 포함한 기초학문을 홀대하지는 않는다. 경쟁력 제고라는 시대적 요구와 진리 탐구라는 본연의 역할은 이중적 과제이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는 이런 나의 주장을 절충적이라고 지적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 기초학문에 기반하지 않은 실용학문은 이내 한계를 드러낼 것이며, 실용적 가치를 외면한 진리 탐구는 결국 대학의 사회적 고립화를 가져올 것이다.

역사적으로 대학의 탄생은 서양 중세 후기에 기원한다. 당시 대학은 교황도 국왕도 치외법권을 인정한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의 자유로운 공동체’였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바우돌리노』를 보면 주인공 바우돌리노는 신학과 철학의 중심을 이룬 파리대학으로 유학을 간다. 만물박사답게 에코는 강의실, 도서관, 선술집, 그리고 매혹과 절망의 연애에 이르기까지 당시 대학 생활을 생생히 묘사한다.

대학은 불변해야 한다는 주장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지식 또한 사회 속에 위치한 것인 만큼 지식의 내용과 방법은 사회변동에 부응해야 한다. 하지만 대학이란 말에 담긴 진리, 자유, 공동체의 가치가 적어도 대학 안에서는 마땅히 존중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개하는 지식정보사회에서 정작 자유로운 진리 탐구가 소외되는 것을 더 이상 놓아둬서는 안 된다. 올바른 대학개혁을 위한 전 사회적 공론화를 요청한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수석 교사

아인슈타인에게 최고의 교사란 어떤 존재일까. “창조적인 표현과 지식에 대한 기쁨을 깨우쳐 주는 게 교사의 최고의 기술”이란 그의 말에 답이 들어 있다. 무릇 교사라면 그래야 당연하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쉽기만 한 일인가. 우리 교사들만 봐도 그렇다. 입시교육, 주입식 교육에 시달리느라 교직에 몸담을 때 새겼던 초심(初心)이 빛바랜 교사가 한둘이 아닐 터다.

그렇다고 ‘아인슈타인 교사’가 없는 건 아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광중 이원춘(54) 교사. 사범대 동기들은 모두 교감·교장이지만 30년째 평교사다. 그의 평생 모토는 ‘수업 잘하는 교사’다. 지금은 ‘전 과목 창의적 수업 개선 방안’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수업 개선 노하우를 학교 밖 다른 교사들에게 전파하는 전도사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느라 교감·교장 승진엔 관심조차 가질 겨를이 없었다. “나를 모델 삼아 수업 방법을 바꿔보겠다는 교사가 느는 게 보람”일 뿐이다.

이 교사는 ‘수석교사’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수업 전문성이 뛰어난 교사를 선발해 수업 개선 역할을 맡기면서 붙여준 칭호다. 2년 전 도입된 제도지만 아직 ‘시범운영’ 딱지가 붙어 있다. 외국엔 이미 수석교사제와 유사한 제도가 정착된 곳이 많다. 영국의 선도능력교사제(Advanced Skills Teacher)는 우리 수석교사제 취지와 가장 유사하다. 관리직에 진출하지 않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면서 자신의 교수법을 확산시키는 게 임무다. 미국은 지역마다 ‘Master Teacher’ ‘Mentor Teacher’ ‘Support Provider’ 등 수석교사 명칭이 다양하나 우수한 수업 방법 보급과 신임 교사 멘토링 등 하는 일은 엇비슷하다. 일본엔 주간(主幹) 교사란 게 있다. 교장·교감과 교사 간 조정자다. 평교사에게 조언을 하고 우수 교사를 육성하는 역할을 한다. 중국에선 ‘특급교사’가 활동한다. 교수·학습의 전문가로 교사의 모범이 되는 교사다.

교과부가 올해 수석교사 333명을 선발해 수석교사제 시범운영을 확대한다고 한다. 하지만 수석교사제 도입 법안이 국회에서 잠자고 있어 겉돌지 않을까 걱정이다. 수석(首席)은 등급이나 직위에서 맨 윗자리를 의미한다. 수좌(首座)라는 말이다. 미국 시인 헨리 롱펠로는 “그에게는 선생의 자리가 옥좌(玉座)였다”고 표현했다. 우리 교사들은 옥좌는 고사하고 수좌에나 제대로 앉을 수 있으려나.

중앙일보 김남중 논설위원

[시론] 교육, 더 늦기 전에 근본으로 돌아가자 [중앙일보]

요즘 우리 사회는 특목고 및 외고 문제 등 주요 교육 현안에 대한 논쟁으로 달아오르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교육의 전반적인 과정을 통해 실현되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교육의 궁극 목적을 되뇌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느덧 균형감을 잃은 채 교육의 외재적 목적이라 할 수 있는 ‘교육현상’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행히 청와대에서 현안을 직접 챙기겠다니 좋은 방향으로 개선은 되겠지만, 지금이야말로 교육의 내재적 목적인 ‘교육본질’로 돌아가 근본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무엇이 ‘바른 교육’인가? 새삼 이런 근본적인 물음에 직면한 우리 현실이 걱정스럽다. 특정학교가 사교육을 부추긴다면서 존폐를 운위하는 것은 수시로 야기되는 교육현상에 대한 과민반응으로 사회적 불안만 가중시킬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세계가 주목하는 명문으로 도약한 학교들에 잘못이 있는가? 지난날의 가혹한 규제 속에서도 각고분투해 오늘의 경쟁력 있는 학교를 만든 것이 죄라면 누가 이 나라 교육발전을 위해 헌신하겠는가.

민주교육은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는 것이지 결과의 균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결과의 균등을 전제하면 교육은 자기한계에 갇혀버린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에 평준화·획일화 교육정책의 폐해를 충분히 경험했다. 개천에서 용도 나고 군계일학도 뜨는 것이 교육이다. 그것이 창의성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이 정부의 자율화 교육정책이 아닌가. 이 정부가 들어서면서 특목고나 자립형, 그리고 기숙형 등 다양한 학교모델을 개발한 것도 이 때문인 줄 안다. 이런 다양한 노력으로 좋은 인재가 많이 나와야 한다. 최근 방한한 케임브리지대학 앨리슨 리처드 총장이 “교육에 대한 (결과로서의) 평가는 필요하나 그 결과가 어떤 교육과정을 통해 나타났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한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 우리는 교육의 본질적인 문제로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교육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부부가 파경의 위기에 처할 때 연애시절로 돌아가 보면 문제가 풀린다는 말이 있다. 또 수사가 미궁이나 답보상태에 빠지면 사건의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고도 한다. 중세의 인문주의 운동도 학문의 변질을 우려하며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근본운동이었고, 르네상스 역시 궁정의 시녀로 전락한 당시 예술의 회귀운동이었다. 모든 면에서 ‘근본으로(ad fontes)’ 돌아가 제자리를 잡아야 하겠지만, 위험수위에 이른 오늘의 교육이야말로 더욱 그렇다. 교육의 제자리는 공교육이 회복되는 바로 그 자리에 다름 아니다. 공교육이 정상화되어 거기서 경쟁력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본연을 회복하는 길이며 교육의 자기정초(自己定礎)다. 주지하듯이 공교육 회복의 관건은 사도(師道) 확립과 인성교육에 있다. 빌 게이츠의 말대로 “문제는 교사다”. 좋은 선생이 좋은 제자를 만든다. 교사가 탁월한 학문성과 인격, 그리고 권위의 삼위일체를 갖춰야 공교육이 산다. 고대 노천교실에서 역사적 인물이 나온 것은 위대한 스승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 당국은 훌륭한 교사 양성과 인성교육에 주력해 주기 바란다. 우리 선생들은 진정 이 시대의 페스탈로치 같은 사명감으로 제자들을 가슴으로 가르쳐야 한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공교육이 강화되면 사교육은 자연히 제도교육에 흡수될 것이다. 이 정부는 역대 정권처럼 집권 중에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조바심을 버리고 국가 백년대계로 교육의 근본부터 다지기 바란다. 우리의 교육이 근본으로 돌아간다면 우리 학부모들도 보다 밝은 미래를 위해 인내하며 기다릴 것이다.

김성영 전 성결대 총장·시인

한국의 교사들은 왜 자기효능감이 낮을까?

교과부 ‘2009 교육지표’
교사 연봉 수준 가장 높고 수업시간 평균보다 적어

우리나라 25~34세 국민 100명 중 97명은 고교를 졸업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2년 연속 고교 이수율 1위를 차지했다. 25∼34세 국민 가운데 전문대·4년제 대학·대학원을 졸업한 국민은 56%로 캐나다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지난해는 53%로 캐나다(55%)·일본(54%)에 이어 3위였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이런 내용의 ‘2009 OECD 교육지표 조사 결과’를 8일 발표했다. OECD 교육지표는 교육기관의 성과와 학습효과, 교육투자 자원, 학습환경 등을 25개 지표로 나타낸 것이다. OECD 회원 30개국과 비회원 6개국 등 36개국이 조사 대상이다. 통계는 2007년(재정은 2006년 기준)을 기준으로 했다.

우리나라의 공교육비 민간 부담률과 대학 등록금은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인 것으로 분석됐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교육비 비율이 OECD 평균보다 1.5%포인트가 높았다. 특히 공교육에 대한 민간 부담률(2.9%)이 OECD 평균(0.8%)의 세 배를 넘었다. 이는 미국·영국·일본 등 주요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다.

학생 1인당 공교육비 지출액은 초·중·고교와 대학 모두 OECD 평균에 못 미쳤다. 특히 대학은 OECD 평균(1만2336달러)에 비해 3772달러나 적었다. 국·공립 대학의 연평균 등록금은 4717달러, 사립대학은 8519달러로 미국(국·공립 5666달러, 사립 2만517달러)에 이어 모두 2위를 차지했다. 학생 1인당 공교육비 지출액과 대학 등록금은 미국 달러의 구매력지수(PPP)로 환산했다. PPP는 나라마다 다른 물가를 반영해 미화 1달러로 실제 생활에서 구매할 수 있는 가치를 계산한 것이다.


교사들의 근무 조건과 급여는 OECD 국가보다 열악하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초·중·고 교사들의 연간 수업일수(204일)는 OECD 평균(186일)보다 많았지만, 연간 순수업시간은 OECD 평균보다 적었다. 순수업시간은 60분을 1시간으로 통일해 산출했다. 교사 급여(15년 경력교사 기준)는 교사의 연봉을 1인당 GDP로 나눠 백분율로 계산했다. 그 결과 초등학교 교사는 2.21%, 중·고교 교사는 2.2%로 분석돼 OECD 국가 중 가장 높았다. 교육과학기술부의 이창윤 인재정책분석과장은 “국가별로 임금체계·근무형태·교육과정 등이 달라 수치를 단순 비교해 평가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23개국을 대상으로 한 교원평가 항목의 경우 ‘교원평가가 공정하다(52.7%)’ ‘업무능률 향상에 기여한다(53.3%)’고 인식하는 교사 비율이 평균(각각 83.2%, 78.6%)보다 낮았다. 교사의 사기를 나타내는 ‘자기효능감’(능력과 자질에 대한 확신)은 조사국 중 가장 낮았다. 한국교육개발원 강성국 교육통계센터 소장은 “공교육 불신 풍조와 교사 권위 추락 등이 교사들의 사기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말했다.

정현목 기자

[시론] 학교 자율화 부작용 최소화하라 [중앙일보]

학교 자율화 추진 방안이 발표되면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자율화라는 기본 방향은 옳다. 그러나 ‘자율’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이미지와 함께 밝은 빛도 가지고 있어서 그 빛에 현혹되기도 쉽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가사유상처럼 반개(半開)한 눈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율화가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는 효과가 정말로 나타날 것인가를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다. 학교교육이 획일화된 것은 국가정책보다는 수능과 대입 성적을 중시하는 사회적 기대 탓이 더 크다. 따라서 교육과정 운영의 자율화는 그나마 제공하고 있던 다양한 교과목 시수를 지키기 어렵게 할 가능성이 크다. 만일 일부가 주장하듯이 정부가 내심 기대하는 것이 다양성이 아니라 ‘학교의 학력을 끌어올리는 것’이라면 이는 부도덕할 뿐만 아니라 과도한 경쟁의 덫에 빠져 있는 우리 학교 상황에 비춰 바람직한 처방도 아니다.

교육과정 자율화 정책이 기대하는 효과를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범학교를 중심으로 점차 확산시키면서 문제점을 보완하고, 자율의 범위를 조정해야 한다. 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은 국민이 되기 위해 필요한 공통적인 역량을 길러줌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공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가 요구할 사항이 있고, 국가의 요구를 자유롭고 경쟁적으로 잘 달성할 수 있도록 단위학교에 부여할 자율권이 따로 있을 것이다.

단위학교 자율권을 확대할 때 또 하나 유념할 것은 자율권 확대가 가져올 부작용이다. 부작용은 자율권 확대로 인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강점이 사라지는 경우와, 지금까지는 없었던 문제점이 생겨나는 경우로 나눠 볼 수 있다. 학교·지역단위 교원 임용 제도 도입은 이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 우리나라 학교정책 중에서 다른 나라에 수출할 만한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교원 순환근무제다. “도서벽지 근무와 학교장 역량과는 무관하다”는 대도시 중심의 단순논리를 가지고 우수 교사들이 소외지역에 근무할 필요가 없게 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신들이 원하는 교사를 따로 채용하기 위한 수순을 밟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국가가 원하는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추진이 중단된 농어촌교육특별지원법을 마련해 유인을 제공하거나 소외지역 학교 근무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자치학교를 만들어주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자치가 보장되지 않는 속에서 추진되는 자율권 확대는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더구나 주로 교장 개인의 역량에 의존하도록 교장의 자율권만 확대하는 것은 전문가 집단으로 구성된 학교조직의 특성과 책무성 주체를 감안할 때 문제가 있어 보인다. 책임을 물어 학교장을 바꾸거나 행정·재정적 불이익을 준다고 해서 책무성이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최종적인 피해는 해당 학교 재학생과 학부모가 받기 때문에 이러한 구성원을 그 학교로 보낸 국가가 책임을 지고 보상을 할 때 궁극적인 책무성이 확보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국가의 이런 책임을 줄이기 위해서는 구성원들(학생·학부모 포함)의 자치권을 확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학교자치를 확대하기 전에 열악한 지역에 대해서는 자치가 가능하도록 기본 여건을 국가 차원에서 갖춰주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학교 자율화 추진 방안을 검토할 때 국가가 져야 할 책임을 자율화라는 미명하에 지방이나 학교에 전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을 잘 살펴보기 바란다. 국민이 보기에 원래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할 문제인데 국가가 지방이나 단위학교에 책임을 전가했을 경우에는 아무리 권한이 이양됐다고 강조해도 결국은 책임을 면하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박남기 광주교육대 총장

학교 폭력 예방법…

근본적으로 폭력을 예방하는 인성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심성을 가르쳐야 폭력과 멀어지는 법이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한국, 영국, 프랑스, 일본의 초등학생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학교에서 타인을 배려가고 존중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고 느끼는 비율이 영국,프랑스 60%, 일본 28.7%에 비해 한국은 15.9%에 불과했다.

이런 교육부터 뜯어고쳐쟈 한다. 학교 폭력의 굴레에 묶여 불안과 절망에 떠는 학생이 존재하는 한 우리 사회의 미래가 밝을 수 없다.

학모와 학교의 절대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자녀가 학교 폭력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부모가 먼저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학교도 평소 학생의 신체나 정신적 상태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등 능동적으로 감지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학교 폭력을 쉬쉬하거나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땜질식 대응은 학교폭력을 키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