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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기적의 놀이터’엔 아이들이 다쳐 멍들 권리가 있다

                                        

기자 박신홍 기자                    
 
놀이터 디자이너 편해문
전남 순천시 기적의 놀이터 1호 ‘엉뚱발뚱’에서 아이들이 모래놀이와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사진 편해문]

전남 순천시 기적의 놀이터 1호 ‘엉뚱발뚱’에서 아이들이 모래놀이와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사진 편해문]

전남 순천에 가면 ‘기적의 놀이터’라는 어린이 놀이터가 있다. 2년 전 조성된 ‘엉뚱발뚱’이란 이름의 놀이터에는 그 흔한 미끄럼틀도, 그네도, 시소도 없다. 넓은 모래밭과 팽나무 고목, 상하수도관 위로 잔디가 덮인 언덕, 마중물을 넣을 수 있는 옛날식 펌프와 얕은 개울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평일엔 200여 명, 주말엔 600여 명의 어린이가 찾는 인기 만점의 놀이터가 됐다. 그해 공공건축 최우수상과 창의행정 최우수상까지 휩쓸자 비결을 묻는 전국 광역·기초단체와 아동 전문가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지난해에만 300여 단체가 벤치마킹을 위해 다녀갔다.
 

300여 곳서 벤치마킹 인기
미끄럼틀·시소 없이 언덕·개울뿐
놀이기구 아닌 다른 아이 찾아 몰려

긁히고 까이며 터득
조금씩 자주 다쳐야 크게 안 다쳐
안전한 놀이터가 더 큰 사고 불러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아이·부모 함께 1년간 직접 설계
집에서 짜증 덜 내고 체력도 향상

순천시는 이후 ‘작전을 시작하~지’와 ‘시가모노(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는 놀이터)’ 등 2·3호를 연 데 이어 2020년까지 시내 곳곳에 기적의 놀이터 10곳을 조성할 계획이다. 아이디어를 내고 기획을 총괄한 주인공은 놀이터 디자이너 편해문(49)씨였다. 어린이날을 맞아 그가 20년 넘게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터득한 ‘아이들만의 비밀’이 뭔지 들어봤다. 겉보기에 평범하기 그지없는 순천의 한 놀이터가 ‘기적’으로 불리게 된 사연도 궁금했다.
 
 
어릴 적 신나게 놀던 기억이 삶의 힘 돼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 가꾸기에 나선 편해문씨. [신인섭 기자]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 가꾸기에 나선 편해문씨. [신인섭 기자]

질의 :어린이 놀이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응답 :“어릴 적 서울 사당동 산동네에서 변변한 놀이기구 하나 없이도 신나게 뛰어놀았는데 그때의 자유로웠던 기억이 이후 내 삶의 힘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면서 요즘 아이들은 커서 어떤 추억을 갖고 살아가게 될까 싶었다.”
 
처음엔 어린이 전래동요에 관심이 많았다. 국내 유일의 민속학과가 있던 안동대에 들어갔다. 그가 전국 구석구석을 누비며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물어 찾아낸 옛날 아이들 노래만 250곡이 넘는다. 창작과비평사의 좋은 어린이책 공모에서 대상을 받은 뒤 아동문학가로도 활동했다. 그러던 중 자연스레 아이들 놀이에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예전엔 아이들이 놀면서 노래를 불렀다. 두꺼비집 짓는 놀이와 노래가 함께였듯이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놀이가 사라지면서 노래도 자취를 감추게 됐더라. 놀이를 복원시켜야겠다 싶었다.”
 
그는 이후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와 『놀이터, 위험해야 안전하다』를 잇따라 펴냈다. 그러곤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새로운 개념의 놀이터를 짓기 시작했다. 기적의 놀이터 성공을 바탕으로 최근엔 서울시와 세종시, 경기도 시흥시에서도 어린이 놀이터 재구성 기획을 맡았다.
 
‘엉뚱발뚱’은 기존 지형을 그대로 살려 아이들이 언덕에서 뛰어놀 수 있도록 했다. [사진 편해문]

‘엉뚱발뚱’은 기존 지형을 그대로 살려 아이들이 언덕에서 뛰어놀 수 있도록 했다. [사진 편해문]

질의 :위험해야 안전하다는 말이 도발적이다.
응답 :“먼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아이들을 위험천만하게 놔둬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위험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해저드(hazard)고 또 하나는 리스크(risk)다. 놀이터에 깨진 병조각이 있거나 난간이 녹슬어서 아이들이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해저드는 당연히 미리 해소돼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충분히 인지하고 통제할 수 있는 리스크에는 열린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놀다가 긁히고 까이면서 조금씩 자주 다쳐야 크게 다치지 않는다. 예방주사와 같은 이치다. 아이들에겐 멍들 권리가 있다. 그러면서 다치지 않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오히려 온실 속 화초처럼 안전하게만 자란 아이가 위험이 뭔지 배우지 못해 더 위험하다.”
 
질의 :그래도 다치게 놔둘 수만은 없지 않나.
응답 :“국내에 7만여 개의 놀이터가 있지만 어딜 가나 ‘조합놀이대 1대, 그네·시소 2대, 탄성 고무매트 바닥’ 3종 세트의 ‘재미없고 지루한 놀이터’로 획일화되고 있다. 놀이터의 두 가지 덕목 중 ‘안전’만 강조하다 보니 ‘도전과 모험’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이런 지루함과 싫증이 더 큰 사고를 부른다. 놀이터에 한 번만이라도 가보라. ‘절대 거꾸로 타지 마시오’라는 팻말 옆에서 아이들이 미끄럼틀을 거꾸로 타고 있다. 안전하다는 놀이터가 실제로는 훨씬 더 위험에 노출돼 있는 셈이다. 독일도 오랜 기간의 조사 끝에 ‘안전한 놀이터가 가장 위험한 놀이터’라는 결론을 내렸다. 호기심 유발이 안 되니 딴짓을 하다가 다치는 경우가 늘더라는 거였다.”
 
질의 :무엇이 가장 문제인가.
응답 :“놀이터의 주인은 놀이기구가 아니라 아이들이란 명제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 지금의 놀이터는 어른들이 기획하고 만들었다. 실제 놀이터를 이용하는 아이들 의견은 전혀 묻지 않은 채 이런 놀이기구를 좋아할 거라고 지레짐작하며. 하지만 붙박이식 놀이기구 위주의 놀이터는 아이들의 외면만 받을 뿐이다. 서울의 한 놀이터에 가봤더니 수억원짜리 놀이기구엔 아무도 없고 한 무리의 아이들이 놀이터 구석에 모여 놀고 있었다. 물어보니 ‘저거 재미없어요. 여기서 노는 게 더 재미있어요’라고 하더라. 아차 싶었다. 아이들을 놀이터에 오게 하는 건 빈 공간과 다른 아이들이지 놀이기구가 아님을 어른들은 잊고 있었던 거다.”
 
그는 “더 심각한 문제는 놀이터가 재미없다 보니 아이들이 찾지 않는다는 점”이라며 “비싼 놀이기구를 들여 놓고 아파트 안에서도 폐쇄회로TV(CCTV)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됐지만 정작 아이들은 없고 고양이만 오가는 게 지금의 놀이터”라고 우려했다.
 
기적의 놀이터는 동네 아이들이 직접 설계에 참여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아이들이 함께 모여 놀이터 모형을 만들어보고 있다. [사진 편해문]

기적의 놀이터는 동네 아이들이 직접 설계에 참여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아이들이 함께 모여 놀이터 모형을 만들어보고 있다. [사진 편해문]

 
비싼 놀이기구에 아이들은 없고 고양이만
 
그는 이 같은 생각을 기적의 놀이터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핵심은 아이들이 직접 만드는 놀이터였다. ‘기적’이란 단어는 기적의 도서관에서 따왔다. “기존에는 책을 엎드려서 보거나 들고 다니면서 볼 수 있는 어린이 도서관이 전무했다. 정작 어린이가 가장 이용하기 어려운 도서관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기적의 도서관이 편견을 깨니까 전국의 도서관이 따라왔다. 기적의 놀이터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동네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들이 직접 놀이터를 설계하도록 했다. 디자이너 스쿨에 모인 아이들이 1년 넘게 내놓은 아이디어를 거의 대부분 반영했다. 부모들과 이웃 주민들도 참여하도록 했더니 모두가 만족스러운 놀이터가 완성됐다. 2·3호도 마찬가지다.”
 
질의 :실제 아이들 반응이 어떻던가.
응답 :“뭐가 좋냐고 하니까 ‘여기 오면 친구가 있어서, 다른 곳에서는 다 하지 말라는 말뿐인데 여기서는 뭐든 할 수 있어서’라는 답이 많았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뭐든 옮길 수 있고 망가뜨릴 수도 있다. 주물로 만든 펌프 손잡이가 한 달에 3~4개씩 부러질 정도다. 그런데 부모들이 더 좋아하더라. 아이들이 집에서 짜증을 훨씬 덜 낸다면서다. 실컷 놀고 들어가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또 처음엔 대부분의 아이가 언덕을 못 올라갔는데 이젠 다들 거뜬히 올라간다. 체력이 좋아지니 부모들도 흡족해 한다. 게다가 서로의 아이를 봐주면서 엄마들도 훨씬 여유로워졌고 이웃 간의 커뮤니티도 복원됐다.”
 
질의 :지자체 호응도 크다던데.
응답 :“시·군·구 담당간부들이 직접 찾아오길래 어떻게 왔느냐고 물어보니 그 지역 부모들이 빨리 가서 좀 보고 오라며 재촉했다고 하더라. 입소문이 퍼지자 아이를 둔 부모 입장에선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던 거다. 서울시교육청과는 학교 놀이터를 바꿔나가기로 했다. 현재 초등학교 두 곳에서 시범 조성 중이다. 중요한 건 학교마다 환경이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 현장 상황에 맞는 각각의 놀이터를 꾸며야 한다는 점이다. 이 또한 학생들의 참여가 필수다.”
 
그러면서 그는 “놀이터의 또 다른 장점은 아이들이 민주주의를 몸소 배울 수 있는 공간이란 점”이라고 강조했다. “학교 학습만으론 민주시민이 되기 어렵다. 놀이터는 이를 훌륭히 보완해줄 수 있다. 각자 주인이 돼서 생각이 다른 아이들과 만나 부딪히고 갈등을 빚으며 자연스레 관계를 익히고 조율하는 법을 깨닫게 된다. 놀이터는 실제 삶을 배우는 곳이자 도시 속 아이들의 마지막 차크라(chakra)인 셈이다.”
 
기적의 놀이터 2호에도 아이들 의견을 적극 반영해 에펠탑 모양의 그물망을 설치했다. [사진 편해문]

기적의 놀이터 2호에도 아이들 의견을 적극 반영해 에펠탑 모양의 그물망을 설치했다. [사진 편해문]

질의 :다른 아이들은 다 학원에 가는데 우리 아이만 놀이터에 보낼 순 없는 게 현실 아닌가.
응답 :“새도 두 날개로 날듯이 아이들도 공부 말고 자유와 놀이가 필요하다는 걸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교육을 왜 하느냐. 균형 잡힌 아이로 키우려는 것 아니냐. 언제까지 방에서 게임만 하게 놔둘 건가. 아이들에겐 놀이가 밥이다.”
 
 
어른 시각으로 만들면 ‘놀이터 토건’에 그쳐
 
그의 또 다른 걱정은 역설적으로 최근 놀이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자체는 물론 정부 부처와 대기업들까지 놀이터 만들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태세다. 그런데 이 거품이 3년 갈까 싶다. 아이를 둘러싼 사회 구성원, 즉 부모와 교사는 물론 공무원과 기업가의 사고가 변하지 않는 한 놀이터만 바꾼다고 아이들 삶이 나아질 것이란 생각은 순진하다. 지금처럼 어른들 시각으로만 밀어붙이면 놀이터 토건, 놀이터 난개발, 놀이터 엔터테인먼트로 흐르기 십상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이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놀이터 가꾸기’에 힘써야 할 때다.”
 
질의 :어린이날을 맞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응답 :“아이들을 제발 좀 놔둬라, 그만 좀 손대라, 부모들에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아이들을 가르치려고만 하지 말고 눈높이를 맞춰야 비로소 소통할 수 있다. 놀이는 아이들에게 공기와도 같은 거다. 채워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잘 채워지도록 돕는 게 부모의 역할이자 책임이다. 또 놀이는 건강이다. 비만, 소아당뇨,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질의 :앞으로의 계획은.
응답 :“아이들에게 놀이터를 정의해 보라면 엄마에게 허락받아야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놀이터가 바뀌려면 부모의 생각이 먼저 달라져야 한다. 이를 위해 ‘플레이 스타트’ 캠페인을 준비 중이다. 영유아 때부터 생애 주기별로 아이들을 어떻게 놀게 해줘야 좋은지 부모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려는 취지다. 아이를 키우기가 점점 어려워지니 초저출산 문제까지 제기되는 것 아니겠나. ‘다시 가고 싶은 놀이터’ 인증 운동도 펼칠 생각이다. 물론 평가 주체는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다.”
  
박신홍 기자 jbje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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