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상 → 재성 → 관성 → 인성으로 이어진다는 인간의 욕구
행복의 순차적 지도 그려보며 세계와 나를 이해했으면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이 바뀌어 갔다. 뭐랄까, 좀 더 현실적이 되었다고나 할까. 앞에서 말한 행복에 관한 좋은 말들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만났을 땐 여지없이 어긋나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돈이 많다고 무조건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이런 이야기는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갖춘 사람에게나 통하는 말일 뿐 하루하루 생계가 걱정인 사람들에게는 별로 가슴에 닿지 않는다. 더불어 무상의 깨달음도 원하는 무언가를 조금이나마 성취해 본 사람이 그 허망함을 알고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지, 아직 기본적인 것들도 해결되지 않아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내려놓고 수행하라는 말은 너무 비현실적인 가르침이었다.
또한 내 행복관에 많은 변화를 준 공부 두 가지를 최근에 하게 되었는데 바로 고미숙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명리학 기초이론과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쓴 심리학 관련 서적들이다. 잘 알다시피 명리학은 수천 년을 내려온 동양의 고전학문이고,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의 연구는 현대 서양의 사회과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두 가지 공부가 완전히 다른 뿌리를 갖고 있음에도 서로 상통하는 점이 많다는 것이다.
우선 두 학문 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요소들은 계속 변화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요소가 돈이나 명예와 같은 단일 요소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성장 과정 속에 있는가에 따라 다른 것들을 원한다는 것이다. 명리학의 경우, 사람은 무엇보다 자기의 끼와 재능을 세상 밖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식상(食傷)이라는 욕구에서 출발하는데 이 과정에서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게 된다. 매슬로의 욕구에 관한 설명도 살펴보면 가장 먼저 허기를 면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욕구들이 충족되어야 다음 단계인 안전에 대한 욕구가 생긴다고 한다.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의식주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 명리학에선 그 재능을 완성하고 마무리를 잘해서 재물화하고 싶어 하는 재성(財星) 욕구로 변한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돈을 본격적으로 벌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매슬로도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가 해결되면 주변 환경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조절 가능한 환경으로 만들고자 하는 안전 욕구가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그중 현대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 집 마련이나 고용 안전에 대한 욕구도 여기에 해당한다. 즉 행복하기 위해선 일단 재정적인 안전을 꿈꾸는 것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 실현되면 명리학에선 지위를 가지고 여러 사람을 책임지는 관성(官星)의 욕구로 또 변한다. 경제적 안정을 이루고 나면 지위를 통해 명예를 얻으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명예를 얻기 위해선 재성을 포기해야, 즉 번 돈을 베풀어야 사람들이 따르고 명예가 생긴다고 말한다. 번 돈을 움켜쥐기만 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매슬로 역시 안정 욕구가 충족되면 소속 욕구, 존경 욕구로 바뀐다. 즉 단체에 소속되어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명예와 존경을 얻고 나면 비로소 공부를 통해 진리를 체득하고 싶어 하는 인성(印星) 욕구로 바뀐다. 매슬로도 자기실현이라는 성장 욕구가 이때 비로소 생기는데 공부를 통해 지혜를 얻고자 하는 인지적 욕구, 수행을 통한 자기 초월 욕구가 이 성장 욕구 안에 포함된다. 즉 무상의 진리를 깨닫는 것도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과 자기존중감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욕구의 변화는 사람마다 주어진 환경이 다르므로 꼭 순차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행복을 꿈꾸며 막연히 좇기보단, 나는 지금 어떤 것들에 결핍을 느끼고 앞으로 어떤 성장의 지도를 그리며 살지 생각해 보는 것이 나와 세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모두의 구체적인 행복을 기원하며 새해 인사를 대신한다.
혜민 스님 마음치유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