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벽 : 동국대 석좌교수
자료출처 : http://www.ktcunews.com/sub03/article.jsp?cid=16817
학생이 종이에 적은 글귀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학생이라는 죄로,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 공부라는 벌을 받아, 출석부란 죄수명단에 적혀, 교복이란 죄수복을 입고, 졸업이란 석방을 기다린다.” 오래 전부터 학생들 사이에서 나돌던 너무나 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제가 처음 직접 접했을 때에는 과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최근에는 고등학교 졸업식 날 학생들이 “출소자 여러분, 12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라고 적힌 피켓으로 축하해주거나 두부를 먹는 퍼포먼스를 하는 섬뜩한 모습까지 심심찮게 보게 되었습니다.
교실에서 학생들이 하나 같이 양손을 머리에 얹고 있는 모습을 본 적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학생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다음 지시 사항이 있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게 하기 위해서 시키는 행동이라고 합니다. 이 역시 초등학교 교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제가 처음 보았을 때에는 두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양손을 머리에 얹은 학생의 모습은 6·25 전쟁 당시 잡혀온 포로가 하던 모습과 너무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교사가 학생을 포로로 생각하거나 적으로 간주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양손을 머리에 얹은 학생의 모습에서 포로의 모습을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혹시 이러한 위력적인 비구어적 메시지를 수년간 받게 되면 학생이 스스로 죄인으로 생각하게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학교가 억압적인 감옥 같이 느껴졌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 학생과 적대적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해볼만 하겠습니다.
“꼼짝 말고 앉아서 공부해!” 참 많이도 들어본 흔한 말입니다. 집에서 엄마한테서 들었습니다. 요즘엔 인터넷에 “공부 잘하는 방법”이란 질문에 올려 진 답변이기도 합니다.
“찍소리 말고 하란대로 해라!” 이런 말도 흔하게 들립니다. 이런 말들은 제 귀에 매우 억압적으로 들려옵니다.
하지만 정작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본인이 ‘엄한 편’이라고 합니다. 과연 엄한 것과 억압적인 것이 같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엄한 것은 아이나 어른이나 모두가 지켜야 하는 규칙이나 행해야 하는 행동의 규범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 규칙과 규범을 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허락된 테두리에서 벗어나면 지적하고 책임을 추궁하는 게 엄한 것입니다. 하지만 테두리 내에서는 상당한 자율권이 보장됩니다.
그래서 엄함에는 아이를 존중해주고 책임감과 판단력 있는 성숙한 존재로 키워주고 싶은 진정한 관심과 돌봄이 깃들어 있습니다.
반면, 억압적인 경우에는 아이가 지켜야 하는 규칙이 바로 어른들 자체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새로운 규칙이 생겨납니다. 충분한 예고 없이 발표되고, 명쾌한 설명 없이 적용됩니다. 존재하는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가 갑자기 지적을 당합니다. 그래서 걸리는 놈이 재수 없는 놈이고 걸릴 때는 그저 억울합니다.
어른들은 다 타당한 이유가 있으니까 규칙을 만들었고 유연하게 적용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 이유가 소통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아이들이 납득을 할 수 없다면, 아이들은 그저 어른이 시키는 것을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노예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적절하고 부적절한지 판단력을 연습해볼 기회를 박탈당한 것입니다.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하기는 글렀습니다.
엄함과 억압은 얼핏 보면 비슷해 보입니다. 법과 규칙이 존재한다는 게 같고 위반 시 벌을 준다는 것이 같습니다. 그래서 쉽게 혼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둘은 확연히 다릅니다.
엄함에는 사랑과 존중과 가르침이 있습니다. 억압에는 혐오와 멸시와 가리킴만 있습니다. 엄함에 배움이 있고 인재를 탄생시킵니다. 억압은 증오를 대물림할 뿐입니다. 엄함은 가정과 학교의 생활방식입니다. 억압은 교도소의 방식입니다. 학교와 가정은 아이에게 엄한 곳이어야 합니다. 어른은 아이에게 엄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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