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에 잠시 고교 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다. 2학년 담임도 맡았다. K 학생이 사고를 친 건 내가 학교에 부임하기 직전이었다. 이미 정학 조치를 받았고, 사건은 경찰에서 검찰로 송치된 상태였다.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K는 소년원에 가야 하지만 선도조건부 기소유예라는 제도를 활용하면 안 갈 수도 있다고 검사가 그러는데, 담임이 서류에 서명하고 책임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처음 듣는 제도였지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러겠다고 했다. 당사자보다 가난에 찌든 그의 홀어머니가 어찌나 고마워하던지 민망할 지경이었다. 이후 K를 여러 차례 만나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무척 순수한 아이였다. 졸업 후 식당 종업원으로 일한다는 소식까지는 들었다. 지금 40대 초반일 것이다.
도종환 시인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고 읊었다.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라고 했다(시 ‘흔들리며 피는 꽃’). 나도 부모나 교사, 교과서가 가르치는 대로 100% 순종하며 마치 깎아놓은 밤처럼, 기름 바른 미꾸라지처럼 자란 사람은 어딘가 불안하다고 느끼는 쪽이다. 성장기, 특히 사춘기의 일탈은 생물학적 견지에서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받아줄 필요가 있다. 단, 교육적으로 부추길 것은 부추기고 가지를 칠 것은 쳐주어야 한다. 그래야 흔들리며 피는 꽃이 되지 자칫하면 흔들리다 꽃도 못 피우고 꺾인다.
학교폭력 가해 사실을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하느냐 여부를 놓고 교육과학기술부와 일부 교육감·전교조가 대립하고 있다. 몇몇 교육감과 전교조는 학생부 기재가 가해 학생에게 ‘낙인’을 찍는 일이고 인격권·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고 보는 모양이다. 틀렸다고 생각한다. 흔들리는 과정도 기록하고 안 흔들리게끔, 또는 이왕이면 멋지게 흔들리게끔 가르쳐야지 아예 ‘흔들린 사실 없음’이라며 감추고 눈감자고? 전혀 교육적인 발상이 아니다. 성장 단계마다 자기 행동에 상응하는 책임을 깨닫고 개선하도록 적절한 장치를 두어야 한다. 폭력행위도 마찬가지다. 낙인효과가 걱정이라면 학생부를 대하는 대학당국과 사회의 시각부터 바로잡도록 유도해야 한다. 피해자 입장과 폭력 억제 효과를 떠올려보라. 무엇보다 학생부라는 문서의 정직성·신뢰성을 생각하면 가해 사실 은폐는 답이 아니다. 안 그래도 학생부 윤색(潤色)에 자기소개서 대필 풍조까지 성행하는 판이다.
빗나간 사랑, 동심(童心)천사주의는 오히려 아이들 장래를 망친다. 학교가 폭력 제재에 손을 놓으면 상대적으로 다수인 피해자군(群)이 그냥 당하고 있을까. 외부의 도움을 구할 것이다. 앞으로 학교가 경찰·변호사들로 북적댈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흔들리며 큰다. 뻔히 흔들리는데 안 흔들린다고 적는 건 위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