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본 중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대부분 초·중학교 아이를 둔 학부모다. 40대 아줌마들의 수다는 한류 드라마로 시작해 살림, 취미생활, 건강·아이 문제로 이어졌다. “흠. 곧 공부 이야기가 나오겠지” 했던 나의 기대는 보기 좋게 무너졌다. 아이들 이야기는 생활태도와 교우관계, 운동 등 클럽활동이 대부분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게임기부터 켠다” “야구부 활동을 하면서부터 저녁에 늦게 귀가하는 게 걱정”이라는 이야기다. 한국에서 또래 자녀를 둔 친구들을 만나면 으레 나오는 아이들 공부며 학원 이야기는 두 시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 학원은 보내느냐”며 슬쩍 운을 떼봤다. 친구들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산수 등 한두 과목은 학원수업으로 보충한다고 했다. 하지만 사립중학교 입시 부담이 없는 아이들은 학원에 다니더라도 주 1~2차례, 말 그대로 학교수업을 보충하는 선이란다. “공부라는 게 잘하면 좋겠지만, 개인차가 있는 거니까…”라는 게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올해 초등학교 1학년에 막내를 입학시켰다는 한 친구는 “유토리(여유) 교육을 중단한다더니 초등학교 1학년 1학기부터 5교시 수업이 생기고 교과서가 두꺼워졌다. 학교 생활에 적응해야 할 어린 아이들에게 너무 부담을 주는 것 같다”고 되레 불만이다. 중·고등학생들은 여름방학 내내 부카쓰(部活)라는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도 알려진 일본 고교야구 고시엔(甲子園) 대회가 대표적인 예다.
그렇다고 일본에서 보습학원이 성행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도 여름방학을 앞두고는 ‘방학특강’을 알리는 학원들의 TV광고가 늘어난다. 유치원·초등학교부터 입시가 있는 사립·국립학교에 진학시키려는 부모 중에는 연 수백만 엔(수천만원)에 달하는 과외비를 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의 이야기다. 일본의 민간교육연구기관인 베넷세교육연구개발센터는 얼마 전 일본의 초등학교 5~6학년의 여름방학 생활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TV 시청과 게임을 하는 시간은 평소보다 1시간16분 길어진 3시간40분에 달했다. 밖에서 뛰어노는 시간은 평균 1시간36분, 집에서 공부한 시간은 1시간2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시간도 1시간이 넘었다. 전체의 30%가 보습학원에 다녔다.
반대로 방학 때 평소보다 더 많은 학원에 다녀야 하는 우리 아이들은 어떤가. 모 국제중학교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초등 6학년 여름방학까지 영어 공인성적을 확보해야 한다느니, 최소한 2~3년의 선행학습은 필수라는 이야기는 전혀 놀랍지 않다. 형편이 괜찮은 가정의 자녀들은 앞다퉈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난다. 해외에 사는 한국 아이들도 예외일 수는 없다. 이곳 도쿄에서 국제학교에 다니는 많은 한국 아이들은 한국의 교과과정을 보충하기 위해 매년 방학마다 귀국해 학원을 전전한다. 학교와 학원이 바뀌었을 뿐 아이들 생활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이쯤 되면 공부를 놓는다는 의미의 ‘방학(放學)’이라는 단어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것 아닐까. 학기 중엔 할 수 없었던 계획을 세우고, 이곳저곳으로 놀러갈 수 있어 기다려지는 방학. 그런 방학을 우리 아이들에게 영영 돌려줄 순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