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의 메시지-김대식 카이스트 교수-중앙일보

1.5kg 고깃덩어리의 선언 … 애쓰고, 노력하고, 그게 바로 행복

[중앙일보]
입력 2013.08.20 00:35 / 수정 2013.08.20
00:40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② 뇌과학의 메시지-김대식 카이스트 교수

“어떤 이미지를 원하나?”라는 물음에 뇌 영상을 만지던 김대식 교수는 “미친 과학자”라고 답했다. 그만큼 그는 인간의 바닥을
보고 싶어 하는 철학자이기도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문제는 뇌다.
현대 뇌과학에 따르면 슬픔도, 행복도 뇌에서 결정된다. 우리가 자아, 혹은 세계라고 믿는 것은 모두 뇌가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일 수 있다.
사람의 기억조차 조작될 수 있다는 실험 결과도 속속 나오고 있다. 단순히 SF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이렇듯 행복에 대한 탐구는 결국 뇌의 실체를 찾는 작업과 다름 아니다. 요즘 서점가에 뇌과학
책이 줄을 잇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그런데 뇌과학은 인문학일까, 아니면 자연과학일까. 이른바 융합의 시대, 둘의 구분은 무의미할
터다.

 뇌과학자인 김대식(46·카이스트 전자공학과)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문학에 행복의 길을 묻는 기획이다. 뇌과학자로서
당신은 여기에 답할 수 있나?” 그는 “뇌과학은 자연과학인데…”라며 잠시 망설였다. 곧장 질문을 던졌다. “뇌과학에선 ‘상처’를 어떻게 보나?”
김 교수는 “뇌과학자는 우리 눈 앞에 펼쳐진 세계를 일종의 전기적 신호로 본다. 다시 말해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본다”고
대답했다

 뜻밖이었다. 그건 “세계가 정말 존재하는가” “자아가 있는가, 없는가”라는 철학의 궁극적 물음과 통하는 답이었다. 요즘
뇌과학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를 허물며 ‘첨단을 달리는 인문학’으로 주목받고 있다. 전통적으로 가슴을 겨누었던 인문학이 가슴 대신 뇌를 문제
삼는 뇌과학 앞에서 ‘헤쳐 모여’를 하고 있다. 14일 김 교수를 만났다. 그는 젊고, 열정이 넘쳤다.

 -뇌과학이란 창문을 통해서
‘상처와 치유, 행복’을 알아보려 한다. 먼저 뇌과학이 뭔가.

 “철학적 질문을 실험을 통해 짚어가는 거라
생각한다.”

 김 교수는 12세 때 독일로 갔다. 다름슈타트 공과대학에서 심리학과 컴퓨터 과학을 전공했다. 처음에 그의 관심은
인공지능이었다. 학부생 때 몇 달씩 밤을 새며 ‘탁구 치는 로봇’을 만든 적이 있다. “공을 딱 쳤는데 30초가 지나자 로봇이 헛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고민했다. 어린 아이도 하는 걸 기계는 왜 못할까. 거꾸로 기계에게 너무 쉬운 ‘2870억×3876’같은 걸 인간은 왜 못할까.
인공지능보다 자연지능을 먼저 알아야겠다 싶었다.” 결국 그는 뇌과학으로 전공을 돌렸다.

 -뇌 안에는 무엇이
있나.

 “나도 그게 궁금했다. 그래서 수술실에 들어가 뇌를 직접 봤다. 그때 가장 신기했던 게 뭔지 아나. 신기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신기한 게 없다. 무슨 뜻인가.

 “뇌는 그냥 머리 안에 들어있는 1.5㎏짜리 고깃덩어리였다.
눈으로 보면 진짜 그런 덩어리다. 생각과 감정, 지각이 그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 우리의 가설이다. 그런데 뇌를 아무리 잘라보고, 해부해 봐도
없었다. 영상도 없고, 소리도 없고, 자아도 없었다. 그냥 세포들이었다. 뇌가 심장에 있는 세포와 다른 점은 각각의 신경세포들이 수천 개, 수만
개의 다른 신경세포와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그 신경세포들이 어마어마한 양의 소통을 하고 있다.”

 -뇌는 어떻게 세상을
알아채나.

 “우리가 꽃밭을 보고 있다. 그럼 빛이 망막으로 들어온다. 빛은 전기적 신호로 바뀐다. 그리고 뇌에 전달된다. 뇌는
형체를 알아본다. 그럼 마지막에 ‘빨간 장미’라는 것이 우리 눈 앞에 나타난다. 그런데 지금도 빨간 장미가 나타나는 그 마지막 부분은 설명이 안
된다. 그럼에도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 뇌가 작동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거다. 나는 뇌가 지능과 정신, 감정을 만든다는 가설을
세우고 있다.”

 -뇌에서 감정을 만든다고 했다. 그럼 뇌과학은 ‘상처’를 뭐라고 보나.

 “나는 뇌가 자신의 주된
기능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때 ‘상처’가 생긴다고 본다.”

 김 교수는 뇌과학을 고고학에 빗댔다. 2000년 된 도시를 들여다보면
길이 누더기처럼 엉망이다. 그렇지만 역사 속에서 새로운 길이 생길 때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는 거다. 뇌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교뇌·중뇌·대뇌가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차례대로 생겨났다고 했다.

 “인간의 뇌는 예전의 생명체들이 가졌던 뇌 구조를 대부분 가지고
있다. 가장 먼저 생겨난 게 현재 생존을 위한 뇌(교뇌)다. 눈 앞에 맛있는 게 있으면 그냥 먹는 거다. 그 다음에 생겨난 게 과거 위주의
뇌(중뇌)다. 여기에는 예전의 경험과 경험마다 매겨둔 가치가 입력된다. 그래서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를 구별한다. 가장 뒤늦게 생겨난
게 대뇌피질이란 미래예측의 뇌(대뇌)다. 이게 용량도 가장 크고, 중요도도 가장 높다. 그래서 인간은 현재의 상태, 과거의 경험을 가지고 미래를
예측한다.”

 그는 대뇌피질의 미래 예측이란 주 기능이 외부의 데이터와 어긋나면 상처가 생긴다고 했다.

 -예를
들면.

 “나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누가 와서 ‘너 바보야’라고 하면 상처를 받는다. ‘나는 똑똑하다’는
예측과 ‘너 바보야’라는 외부의 데이터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때 우리는 상처를 받는다.”

 - 그럼 이 상처를 어떻게 풀
수 있나.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내가 똑똑하지 않구나’하고 내가 만든 모델을 바꾸는 거다. 그럼 외부의 데이터와
일치하게 된다. 또 하나는 ‘저 사람 말이 틀렸다. 나는 똑똑하다’라며 바깥에서 들어온 데이터를 무시하는 거다.”

 -모델과
데이터, 결국 둘 중 하나를 바꾸는 건가.

 “맞다. 재미있는 건 과학에선 대부분 나의 모델을 바꾸라고 말한다. 그런데 뇌는 거꾸로
한다. 외부의 데이터를 무시하는 경향이 오히려 강하다. 왜 그럴까. 나의 모델은 수십 년에 걸쳐서 차곡차곡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 그게 바로 ‘에고(ego)’인가.

 “그렇다. 어렸을 때 우리는 데이터를 따라서 모델을 계속 바꾼다.
그걸 통해 성장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나의 모델은 안 바꾸고 외부의 데이터를 바꾸려 한다. 그게 완고해지는 거다.”

 -어떤
게 효과적인가. 모델을 바꾸는 건가, 데이터를 바꾸는 건가.

 “처음에는 나의 모델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나의 존재성이 생긴다.
불일치 하는 데이터가 한두 번 들어와도 무시하면 된다. 그런데 그런 데이터가 계속해서 들어온다고 하자. 그럼 얘기가 달라진다. 적당한 순간부터
모델을 바꾸어야 한다. 이걸 잘하지 못하면 상처를 자주 받거나, 상처를 오래 받는 사람이 된다.”

 - 그럼 나의 미래예측과 외부
데이터가 일치할 때 우리는 행복해지나.

 “상처가 치유될 때 예측과 데이터는 일치한다. 그런데 우리가 ‘행복’이라고 말할 때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하나는 만족감이다. 배 부르고, 편하게 쉴 수 있고, 내가 예측한 것과 세상의 메시지가 일치해서 돌아가는 거다. 그때는
아픔도 없고 만족스럽다. 그런데 그건 만족이지, 행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그럼 행복이란 어떤 건가.

 “지금
나의 상황이 만족스럽다고 하자. 그럼에도 일치하던 세상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다시 불일치하게 만드는 거다. 이때는 외부에 의한 수동적 불일치가
아니다. 나의 주도에 의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불일치다. 그걸 통해 새로운 레벨로 업그레이드하면서 다시 일치를 향해 가는
거다.”

 김 교수는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산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이들은 영국에서 먹고 살만한 인생들이었다.
굳이 오르지 않아도 되는데 스스로 불일치를 만든 것이다.

 “저 산에 도전하고 싶다. 그래서 도전하고, 정상에 오르고, 만족을
느끼는 거다. 그 다음엔 또 다른 불일치를 찾아 간다. 결국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과 나의 불일치를 만들어내고, 그걸 극복하는 절차와 과정이
행복이라고 본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주도’ ‘내가 원하는 방향’ ‘스스로 만든 불일치’가 중요하다. 창의적인 행복은 변화를
동반한다.”

글=백성호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대식 교수의 추천서

“뇌과학자로서 당신이 서있는 마지막 낭떠러지는
어디냐”고 물었다. 김대식 교수는 “뇌과학이 마지막에 풀어야 할 것은 결국 철학적 문제다. 뇌라는 물질이 어떻게 정신이란 비물질을 만들어낼까.
그게 정말 있는 건가, 아니면 없는 건가. 정신이란 게 없다면 단순히 우리의 착각인가. 이런 물음들”이라고 답했다.

 그는 “읽으면
재미있고, 우울해지거나 행복해지는 스토리들”이라며 뜻밖에도 과학서가 아닌 소설책 세 권을 추천했다. 소설만큼 세상사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계속되는 이야기(세스 노테봄 지음, 김용주 옮김, 이레)=여행작가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세스 노테봄의 대표 소설. 철학 선생님이 어린 학생을 사랑했다. 너무 어리고 아름답기에 ‘영원함’이라는 단어를 감히 쓸
정도였다. 학생은 교통사고로 무의미하게 죽는다. 먼 훗날 자신이 죽는 날, 선생은 학생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픽션들(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민음사)=단어들의 모든 조합을 통해 만들어진 무한개의 책들을 보관한
도서관이 있다면. 그 어딘가에 존재에 대한 모든 비밀을 푸는 정답이 적혀있지 않을까. 보르헤스의 『픽션들』중 ‘바벨의 도서관’ 이야기다. 작가는
존재의 원리와 그 비밀을 묻는다.

◆만약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영어 제목 If on a Winter’s Night a
Traveler, 이탈로 칼비노 지음)=국내에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한번 상상해보자. 오랜만에 너무나 재미있는 소설책 내용이 중간에 갑자기
끊긴다면.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주인공은 책 원본을 찾아 전세상을 떠다닌다. 인생은 결국 무엇일까. 이탈리아 대표작가 칼비노는
인생을 끝나지 않는 스토리로 바라본다.

 
◆김대식 교수=1967년생. 12세 때 부모를 따라 독일로 갔다. 독일 다름슈타트 공과대학에서
심리학과 컴퓨터 과학을 전공했다. 막스플랑크 뇌연구소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MIT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밟았다. 현재 카이스트
전자공학과 교수로 있다. 주로 뇌과학과 뇌공학, 사회 뇌과학, 인공지능 등의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자료출처] 중앙일보 : http://joongang.joins.com/article/239/12380239.html?ctg=

직관적인 리더가 더 성취하는가

직관적인 리더가 더 성취하는가?[중앙일보] 입력 2013.08.09 00:25 / 수정 2013.08.09
00:25


“저는 제 직관을 믿는 편입니다.” 기업 리더들에게 종종 듣는 얘기다.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한참 얘기하면, 고개를 끄덕이던 분들이 마지막에 내게 들려주는 허탈한 고백이다. “그래도 저는 제
직관을 믿는 편입니다.” 우리나라 기업의 많은 의사결정은 리더의 직관에 좌우된다. 기업이 데이터를 활용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사소한 이슈에는
데이터를 찾느라 골머리를 썩이고 정작 근거가 필요한 중요한 의사결정은 직관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직관을 믿는 리더를 직원들이 설득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기업은 오판을 바로잡을 기회를 잃게 된다. 주먹구구식 문제 해결을 직관적 의사결정이라 믿는 리더들은 내게
“합리적 판단이 늘 정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정중히 조언해 주신다.

 영국 서리대학교 경영학과 유진 새들러-스미스 교수의 저서 『직관』에 따르면, 서구 사회는
비즈니스 영역에서 직관을 칭송하는 관행이 1980년대까지 매우 이례적인 행동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최근 ‘합리적 의사결정에만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도록 직관도 활용해야 한다’는 반대급부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의사결정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직관에만 의존하는 기업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우리나라에선 이런 움직임이 ‘그래, 우리가 틀린 게 아니었어!’로 읽히고 있어 무척 안타깝다.

 우리 뇌는
심사숙고를 통해 결론을 도출하기도 하고, 순식간에 상황을 판단해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이 두 시스템이 동시에 작동하며 상호 보완을 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상황에 맞게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때때로 이 두 시스템이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하기도 하는데, 이때 딜레마가
생긴다. 무엇을 따를 것인가?

 칼럼니스트 맬컴 글래드웰은 그의 저서 『블링크』에서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지는 빠른 상황 판단이
매우 유용할 때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이 심사숙고의 결과물보다 더 우수하다는 과학적 근거는 아직 없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문제에 따라 다를 뿐이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직관이 무엇인지, 순식간에 내리는 판단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지 과학자들도 아직 잘
모른다. 논문검색엔진으로 ‘직관’에 관한 심리학적·신경과학적 연구를 찾아보니, 지금까지 겨우 800여 편의 논문이 출간됐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얘기다.

 과학자들이 데이터를 지나치게 신뢰하는 직업병이 있긴 하지만, 결코 직관의 중요성을 폄하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사실의 발견, 진리를 향한 도약과 전진, 그리고 무지에 대한 정복은 이성이 아니라 상상력과 직관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고 말한 프랑스 미생물학자
샤를 니콜에게 과학자 대부분은 동의할 것이다. 그 유명한 아인슈타인도 직관에 대한 지나친 숭배자가 아니었던가!

 기업 내에서 직위가
높아질수록 직관을 더 많이 사용하며, 더 중요하다고 대답한다. 직관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엄연히 존재하고, 실제로 사용되며, 많이 의존하고
있다면, 우리가 현실적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는 직관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기업 환경을 바꾸는 일일지 모른다. 직관에 의존해 의사결정을
한다면, 직관적으로 더 나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얘기다.

 먼저, 직관은 고정관념에 더 많이 영향을 받으며, 강렬하게 경험된다고 해서 더 정확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따라 그 강렬한 경험에 이끌려 앞뒤 안 가리고 결정하지 말고, ‘직관과 분석 중 어떤 것이 더 나은
결과를 주는 문제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직관은 선호 혹은 도덕적 판단에 유용한 반면, 분석은 우열 판단에 더
유익하다.

 업무 환경에서 ‘직관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일 처리 방식을 수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대부분의 업무 보고서들을
살펴보라. 따분하게 나열돼 있는 그 장표들에서 나무가 아닌 숲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데이터의 숲에서 직관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는 보고서가
직관적인 리더들에겐 절실하다.

 파워포인트 발표와 수많은 수치들, 그리고 그래프와 표. 정작 리더들은 제대로 보지도 않으면서 이런
것들을 직원들에게 요구하지 말고, 시장에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직원들과 난상토론을 하면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직관은 ‘왠지
끌리는 답’을 순식간에 보여주지만, 통찰력은 복잡한 상황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빛을 선사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통찰력이다. 그것이
분석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든, 직관에 의해 도달한 것이든. 직관적인 리더가 더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통찰력을 가진 리더가 결국
성취한다.

                                                                                                                         정재승 KAIST 교수·바이오 및 뇌공학과

마키아벨리의 말

마키아벨리는 “정의롭지만 혼란한 사회와 정의롭지 않지만 질서 있는 사회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동기보다는 결과를, 도덕보다는 현실을 중시하는 정치를 옹호한 대표적 사유로 인용되는 문구다. 그러나 과정과 타협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등장 이후의
표제는 ‘정의롭고 질서 있는 사회’로 바뀌었다.

덩샤오핑의 말-젊은이의 역할에 대하여

“ 예순 넘으면 의사결정보단 대화에나 적절하다”고 덩샤오핑이 말했을 때가 88세였다. 천안문 사태 이후 상하이·선전 등을 돌며 보수화하는
지도부에 개혁·개방과 새 세대의 등장을 촉구한 그는 오히려 어느 누구보다 젊었다.
그러나 우린 안다. 덩이 예외적 인물이란 걸.

 

그래서 이헌재 전 부총리의 조언에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경제는
정치다』).
 “산업화가 급진전하던 시기에 주도세력 대부분은 40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며
정책은 60년대 식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사람 누구도 이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 세대교체하자면 자신들의 공헌을 무시한다고 섭섭해한다. 내 경험을
봐도 사회 중심축은 젊어져야 한다. 98년 정부에 들어갔을 때가 50대 초반이었다. 어떤 일이라도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60대에 부총리로
갔더니 무엇 하나 하려고 해도 생각이 많았다. 지금은 기존 시스템과 인물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혼돈의 시대다. 새로운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게 불가피하다.”
 지난해 2월 얘기다. 우리 사회는 달라졌는가. 오히려 거꾸로 아닌가. – 중앙일보 고정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