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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공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희로애락 고리 끊으러

[중앙일보] 입력 2013.10.01 00:52 / 수정 2013.10.01 01:01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⑦ 동양신화의 재발견 -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

정재서 교수는 동양신화의 가치를 되살리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그는 “자연과 연결될 때 우리는 외롭지 않다. 치유도 된다. 요즘 부는 캠핑 열풍의 바닥에도 그게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흔히 신화라고 하면 그리스·로마 신화를 떠올린다. 현대사회에서 서양신화가 주도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양에도 신화가 있다. 서양신화에서 찾을 수 없는 매력도 있다. 나와 자연, 그리고 우주가 어깨동무를 하는 풍경이다. 27일 정재서(61·이화여대 중문과) 교수를 만났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동양신화 전문가다. 그에게 신화와 인간을 물었다.

동아시아 신화에서 인류의 조상으로 불리는 복희(오른쪽)와 여와 남매. 허리 위는 인간, 아래는 뱀이다. 대홍수 뒤에 둘만 살아남자 부부가 됐다.
 - 왜 신화가 생겨났나.

 “인류가 벌거벗고 살았을 때다.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예상치도 못했던 폭풍이 몰아치고, 홍수가 나고, 화산이 폭발했다. 고대 인류는 자연의 폭력을 두려워했다. 그런 공포에 대한 해결책이 스토리, 곧 신화였다.”

 - 신화가 그걸 어떻게 해결했나.

 “해 속에 누가 있고, 달 속에 누가 산다는 식으로 인간과 자연을 동일시했다. 그게 무섭기 짝이 없는 자연과 화해하고, 갈등을 조절하게 했다.”

 - 신화는 그들의 현실에서 왔나.

 “물론이다. 신화는 생생한 현실에서 왔다. 공상에서 온 게 아니다. 원시인들이 여유가 어디 있었겠나. 오늘 당장 나가서 먹거리를 못 구하면 굶어 죽을 판인데. 절박했다. 우리에겐 동화로 들리지만, 그들에겐 현실을 해석하는 과학이었다.”

 옛 고구려 벽화에는 ‘반인반수(半人半獸·반은 사람이고 반은 짐승)’가 그려져 있다. 소머리를 한 인간. ‘농사의 신’으로 불리는 염제(炎帝) 신농(神農)이다. 그리스 크레타 섬에도 소머리 인간이 나온다. 왕비가 황소와 교접해 낳은 미노타우로스다. 정 교수는 “이 둘의 차이가 동양신화와 서양신화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 왜 그런가.

 “서양신화는 ‘반인반수’를 괴물로 봤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노타우로스는 사람도 잡아먹었다. 출생도 불순하다. 나중에는 아테네의 영웅이 미노타우로스를 격퇴했다. 이뿐만 아니다. 메두사·켄타우로스(상반신은 인간이고 하반신은 말)·스핑크스 등 서양의 반인반수는 다 그렇다.”

 - 왜 괴물로 봤나.

 “그리스는 인간 중심의 사회였다. 인간이 표준이었다. 그들은 신을 그릴 때도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렸다. 그리스 신은 건장하고 잘 생긴 남성,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동물은 열등한 존재였다. 그런 사람과 동물이 섞이니 반인반수는 나쁜 존재였다.”

 - 그럼 동양신화는 어땠나.

 “동양 신화의 신들은 반인반수가 많다. 하지만 달랐다. 동양에선 그게 괴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동물=자연’이라고 봤다. 그래서 반인반수는 인간과 자연의 교감, 혹은 합일을 의미했다.”

 - 구체적인 예를 들면.

 “동아시아 신화에서 인류의 조상은 복희(伏犧)와 여와(女<5AA7>)다. 고구려 벽화에도 있다. 대홍수 뒤에 그 둘만 살아남았다. 그들은 하반신이 뱀이다. 그래도 동양에선 그들을 괴물로 보지 않았다. 뱀은 생식력이 뛰어나고, 번식을 잘했다. 게다가 껍질을 벗고 영원히 산다고 믿었다. 인간보다 낫다고 믿었다. 오히려 신성시했다.”

 요즘 아이들은 이 그림을 보며 ‘괴물’이라고 말한다. 정 교수는 “우리가 서양신화에 익숙해져 상상력의 표준이 바뀐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양신화는 인간을 중심에 두었다. 동양신화에서 중요시한 건 달랐다. 자연과 화해하고, 다른 생명과 공존하는 것이었다. 모든 생명이 촘촘한 관계망 속에서 연결돼 있다고 봤다. 여기에 어떻게 소외가 있고, 단절이 있겠나. 그런 생명의 연대성, 생태적 감수성이 동양신화에 담겨 있다.”

 - 우리는 왜 소외와 단절을 느끼나.

 “요즘 유행하는 노래 가사를 들어봤다. 거기에는 자연이 없더라. 달도 없고, 새도 없고, 바람도 없더라. ‘내가 너를 좋아한다. 그러니 다 줄게.’ 뭐, 그런 투다. 인간과 자연을 매개하는 장치가 없다. 나와 자연이 단절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생기는 외로움이나 상처는 고스란히 자신의 몫으로 남는다. 그래서 더 외롭고, 더 아프다.”

 - 자연이 끼어들면 달라지나.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를 보자. ‘펄펄 나는 저 꾀꼬리/암수 서로 정답구나/외로워라 이 내 몸은/뉘와 함께 돌아갈꼬.’ 나의 외로움을 자연에 한 번 담갔다가 꺼내보라. 그럼 담백해진다. 자연이 들어올 때 인간의 감정이 여과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중국의 춘화(春畵)도 그렇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 옆에는 항상 나무가 있거나, 바위가 그려져 있다.”

 - 그건 왜 그런가.

 “자연을 함께 보면서 음탕한 생각이 조절되는 거다. ‘즐겁되 음란하지 않고, 슬프되 상처를 받지 않는다.’ 그게 ‘낙이불음 애이불상(樂而不淫 哀而不傷)’이다. 자연에는 그런 조절의 기능, 치유의 기능이 있다. 자연 혹은 우주와 동일한 리듬으로 살아가는 것. 동양에선 그걸 인간의 생존 조건이라 봤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신화에도 그런 생태적 감수성이 담겨 있다.”

 요즘 인기 있는 여신은 ‘비너스’나 ‘헤라’다. 대부분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들이다. 100년 전만 해도 달랐다. 남녀노소 막론하고 ‘서왕모(西王母)’를 좋아했다. 서왕모는 서쪽 곤륜산에 사는 불사(不死)의 여신이다. 여인의 모습인데 호랑이 이빨에 표범 꼬리를 한 반인반수다.

 “허난설헌은 서왕모의 광적인 팬이었다. 시도 쓰고, 자신과 동일시할 정도였다. 궁중에선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서왕모 춤’이 있었다. 사람들은 집안의 병풍에도 서왕모를 그렸다.”

 서왕모에 얽힌 신화가 있다. 주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는 주목왕이 곤륜산으로 서왕모를 찾아간다. 불길이 치솟는 염화산을 지나, 새의 깃털마저 가라앉는 약수라는 강을 건너서 서왕모를 만나는 이야기다. “서왕모 신화는 나중에 ‘서유기’로 연결된다.”

 - 서왕모 신화와 서유기의 끈은 뭔가.

 “3000년 만에 꽃이 피고, 다시 3000년이 지나야 열매를 맺는 게 선도 복숭아다. 하나만 먹어도 1만8000살을 산다. 손오공이 따먹고 난리를 쳤던 그 복숭아 밭, 반도원의 주인이 서왕모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후에 ‘서왕모 신화’가 ‘서유기’로 옷을 갈아입었다. 구도가 똑같다. 신화적 원형은 시대를 거치며 계속 옷을 갈아입는다.”

 - 두 이야기의 메시지는 뭔가.

 “서왕모는 서쪽 곤륜산에 산다. 손오공도 서쪽으로 불경을 구하러 간다. 곤륜산에는 불사의 복숭아가 있다. 손오공이 도착한 영산에는 불경이 있다. 그게 불사약이다. 영원성을 상징한다. 결국 구원을 찾는 거다. 서왕모 신화의 불길이 치솟는 염화산은 서유기에도 등장한다.”

 - 그럼 손오공은 뭘 의미하나.

 “원숭이는 흔들리기 쉬운 자아를 뜻한다. ‘의마심원(意馬心猿)’이란 말이 있다. ‘생각은 말처럼 날뛰고, 마음은 원숭이처럼 까분다.’ 손오공은 우리 자신을 상징한다. 손오공이 요괴와 싸우는 건 내 안의 욕망을, 희로애락을 하나씩 깨부수는 거다. 그걸 통해 서쪽으로 가는 거다.”

 - 그 길이 치유의 과정인가.

 “그렇다. 겉으로는 지상의 행로지만, 실은 마음의 행로다. 신화에서 영웅은 항상 길을 떠난다. 여행이 곧 치유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정 교수에 따르면 중국에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안긴 가오싱젠(高行健)의 『영산(靈山)』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도 실의에 빠진 지식인이 신비의 산을 찾아간다. 문화대혁명 이후 구심점이 빠져있던 중국이 새로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이 작품은 81장으로 돼 있다. 『서유기』에는 81난이 나오고, 노자의 『도덕경』도 81장이다. 신화는 이런 식으로 변주가 되는 거다. 영화 ‘반지의 제왕’도 그렇다.”

 - ‘반지의 제왕’이 신화와 관련 있나.

 “그렇다. 게르만 신화가 바탕이 됐다. 그 신화에도 절대반지와 여행이 등장한다. ‘해리포터’도 마찬가지다. 영국 켈트족 신화에서 나온 거다. 서양의 온갖 마녀 신화가 현대적인 옷으로 갈아입은 거다.”

 - 동양신화 속에 흐르는 인간의 행복은 어떤 건가.

 “나와 자연이 촘촘하게 연결돼 있음을 아는 거다. 그걸 통해 자연의 리듬과 같이 사는 거다. 그래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 자연과 우주와 연결된 생명임을 아는 거다. 거기에는 상처와 고통에 대한 자연 치유력이 흐르고 있다.”

글=백성호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정재서 교수=서울대에서 중문학과 생물학을 전공했다. 중문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 옌칭 연구소와 일본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에서 연구생활을 했다. 현재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로 있다. 신화학과 도교학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상상력을 풀고 있다. 저서로 동양 신화를 분석·정리한 『이야기 동양신화』 『중국 신화의 세계』 등이 있다.

정재서 교수의 추천서

정재서 교수는 “설화 ‘선녀와 나무꾼’을 보면 선녀가 하늘과 땅을 연결한다. 인간과 자연을 잇는 거다. 또 ‘견우와 직녀’ 신화는 천제의 딸 직녀와 소몰이꾼 견우의 사랑담이다. 서양의 ‘신데렐라’처럼 결혼이 상하 계층간 갈등을 조정하고 화해하는 장치로 등장한다. 고대 동양사회에서도 그게 중요했던 거다”라고 말했다.

◆신화의 힘(조셉 캠벨·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이끌리오)=미국의 저명한 신화학자 조셉 캠벨과 저널리스트 빌 모이어스의 대담집이다. 신화의 본질·의미·기능 등에 대해 쉽게 설명한 책이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신화가 지니는 치유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누워서 노니는 산수(이종묵 편역, 태학사)=조선시대의 산 수유기 중 걸작을 뽑아 번역과 해설을 한 책이다. 옛사람이 자연을 찾아 노닐던 생각·감흥 등을 읽다 보면 각박한 현실을 사는 우리의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채근담(홍자성 지음, 조지훈 옮김, 현암사)=마음을 다스리는 중국 명나라 때의 고전이다. 유교·불교·도교의 교훈과 격언을 담고 있다. 자연의 도리·수양·처세 등에 대한 내용을 쉬운 예화를 들어 설명한다. ‘동양의 탈무드’로 불리는 지혜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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