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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쌓인 138억 년 우주 나이테 … 매 순간이 귀하지 않나

[중앙일보] 입력 2013.09.25 00:15 / 수정 2013.09.25 00:44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⑥ 천문학의 지혜 - 홍승수 서울대 명예교수

국립고흥청소년우주체험센터에서 홍승수 원장이 목성 모형 앞에 섰다. 홍 원장은 “과학을 한다는 건 겉으로 보이는 사실 뒤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흥=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우주의 이치를 궁리하는 게 천문학이다. 인간의 천품을 공부하는 건 인문학이다. 12일 전남 고흥군 나로도에서 만난 홍승수(69·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 국립고흥청소년우주체험센터 원장은 “하늘의 패턴을 보다 보면 인간의 패턴이 보인다”고 말했다. 138억 년(빅뱅 이후 우주의 나이)이란 우주의 무늬를 들여다보면 채 100년을 살기 어려운 인간의 무늬가 보이는 걸까. 그에게 우주와 인간, 그리고 행복을 물었다.

 홍 원장은 우선 ‘인간의 패턴’을 풀었다. 어렸을 때였다. 그는 아버지와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캄캄한 밤, 보름달이 자꾸만 따라왔다. “그게 굉장히 무서웠다. 뛰어도 보고, 멈추어도 봤다. 그래도 돌아보면 달이 계속 따라왔다.” 아버지에게 물었다. “달이 왜 자꾸 쫓아와요?” 아버지는 “넌 아직 어려서 설명을 해줘도 모른다”고 했다.

 이런 게 씨앗이 됐을까. 그는 고3 때 서울대 천문기상학과를 지원했다. 담임선생은 “어떻게 밥 먹고 살려고 하느냐”며 입학원서에 도장을 찍어주지 않았다. 집에선 공대나 의대를 가라고 했다. 고집을 부렸다. 결국 입학했다.

 1967년 대학을 졸업했다. 군대를 갔다 오니 막막했다. “천문학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었다. 국내 천문학 여건은 엉망이었다. 미국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께선 돌아가셨고, 집안은 망했다. 빚만 잔뜩 있었다. 비행기표 살 돈도 없었다. “처참했다. 아무리,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다. 불가능했다.”

 그는 무작정 서울시청 앞 반도호텔로 갔다. 거기에 외국항공사들 사무실이 있었다. “내가 미친 거다. 너무 답답해서 그 앞을 오갔다. 너무 막막해서 그냥 서 있었다.” 그때 누가 어깨를 툭 쳤다. 문리대 동창이었다. “왜 여기 있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친구는 “문제없다”며 그의 손을 잡고 노스웨스트 항공사 사무실로 갔다.

 결국 그는 외상으로 표를 구했다. “가난한 유학생을 위해 외상으로 표를 주는 제도가 있었다. 믿기질 않더라. 1971년이었다. 그런 게 있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나. 친구는 해외 입양일을 하던 펄벅재단에 있었다. 덕분에 그걸 알고 있더라.” 그는 두툼한 수표책을 받아서 미국에서 돈이 생길 때마다 10불씩, 20불씩 갚았다.

 그는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네덜란드 라이덴대학과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우주천문학연구소에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78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 교수가 됐다.

 “마흔다섯이 되던 정월 초하루였다. 갑자기 ‘야~, 앞으로 내가 살 시간이 살아온 것보다 짧겠구나’ 싶었다. 고민이 되더라. 앞으로 어떻게 살 건가. 그래서 나의 시간축을 살펴봤다. 지나온 삶을 차분하게 복기(復棋)해 봤다.”

 - 복기를 했더니 어땠나.

 “당시에는 몰랐다. 삶의 고비마다 어떤 터닝 포인트가 있더라. 거기서 삶이 이쪽으로 꺾어지고, 저쪽으로 꺾어지고 했더라. 그런데 그때마다 내가 도저히 기대도 안 했고, 상상도 안 했던 인물이 나타나 결정적인 기여를 해줬더라. 그때는 그게 중요한 줄도 몰랐다. 고마운 줄도 몰랐다. 이 사건이 왜 나한테 터졌나 그 고민만 했다. 그런데 복기를 해보니 알겠더라. 거기에는 어떤 흐름이 있더라. 삶을 관통하는 도도한 흐름이 있더라. 그런데 이 우주에도 그런 도도한 흐름이 있다.”

 ‘인간의 패턴’을 말한 홍 원장은 이제 ‘우주의 패턴’을 꺼냈다. “빅뱅으로 우주가 처음 생겨났다. 그때 우주에는 수소와 헬륨만 있었다. 다른 원소는 없었다. 원소 알갱이들이 무작위로 부딪혔다. 수없이 많은 작은 고체와 기체구름 덩어리가 생겼다. 어마어마한 시간이 흘렀다. 덩어리끼리 뭉치고 뭉치면서 비로소 별(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과 행성이 생겼다.”

 홍 원장에겐 천문학자로서 본질적인 의문이 있다.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그는 천주교 신자다. 고3 때 영세를 했다. “공부를 하다가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천문학적 지식이 있다. 지금은 정리가 됐지만, 당시에는 정리가 되지 않았다.”

 - 그게 뭔가.

 “내 몸을 구성하는 물질, 그걸 원자적 수준으로 내려가서 분석해 봤다. 그랬더니 수소와 헬륨만 빼고 모두 다른 별의 내부에서 만들어졌더라. 저 나무도, 저 바위도 마찬가지다. 별은 수명이 다하면 폭발한다. 수없이 많은 별이 폭발하며 퍼뜨린 원소 알갱이들이 뭉쳐서 지구를 만든 거다. 거기서 생명이 나오고, 나도 나온 거다. 이런 생각이 나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 그게 왜 심각한 건가.

 “내 몸의 구성 성분과 저쪽 별의 구성 성분이 똑같은 거다. 그건 충격이었다. 우주와 합일, 자연과 합일을 얘기하지 않나. 원자적 수준에서 봤더니 물질 성분도 똑같다는 거다. 같은 오리진(근원)이라는 거다.”

 우주가 시작될 때는 탄소가 없었다. 별이 폭발과 탄생을 거듭하는 핵융합 반응을 통해 무거운 원소를 만들었다. 그래서 탄소도, 질소도, 산소도, 철도 생겨났다. 지구 생명의 핵심은 ‘탄소 화학’이다. “나는 어디서 왔나. 지구에서 왔다. 지구는 어디서 왔나. 아까 얘기한 고체 알갱이에서 왔다. 그럼 그 알갱이는 어디서 왔나. 죄다 별에 있어야 할 놈들이다. 그러니 나는 철저하게 수없이 많은 별의 내부에서 만들어진 존재더라. 거기에 무려 138억 년이 걸렸다.”

 - 우리는 자신의 나이를 말하며 “올해 스물둘이야, 쉰다섯이야, 일흔셋이야”라고 말한다. 그런 ‘나’가 138억 년의 준비를 거쳐 나온 존재라는 건가.

 “그렇다. 그걸 아니까 이건 어마어마한 신비더라. 그러니까 아~, 인생은 살만한 것 아니냐 이거다. 그렇지 않나. 인생은 정말 치열하게 살 가치가 있는 거다. 요즘은 이걸 부르는 말이 있더라. ‘빅 히스토리’. 이걸 알면 138억 년이란 ‘빅 히스토리’의 연장선에서 내 삶을 봐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그렇게 보면 무엇이 달라지나.

 “그 눈으로 자신의 삶을 보자. 우리를 화나게 하고, 슬프게 하는 일들을 보자. 상처와 고통을 보자. 그럼 가벼워진다. 별거 아니다. 나는 1만 년의 문명을 이야기하며 인간이 치유될 것 같진 않다. 그런데 138억 년이란 우주의 시간은 우리를 치유하기에 부족하지 않으리라 본다.”

 정리된 많은 가닥의 실이 바닥에 놓여 있다. 그걸 만지다 보면 서로 엉키게 마련이다. 또 엉키는 가운데 매듭이 지워진다. 홍 원장은 “그렇게 매듭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게 바로 자연의 창발성, 혹은 창조성이다”고 말했다.

 - 그건 의도적인 건가.

 “무작위의 시도다. 생명의 진화사는 끊임없는 시도다. 하나의 종이 태어나고, 종이 끝나고, 또 새로운 종이 태어난다. 정해진 건 없다. 그냥 해보는 거다. 그러다 뭔가가 나온다. 끝없는 혼돈과 충돌이지만 138억 년의 눈으로 보면 다르다. 아메바에서 인간까지 이어지는 거다. 거기에는 어떤 ‘도도한 흐름’이 있다.”

 - 우리 삶도 마찬가지인가.

 “그렇다. 지금은 혼돈과 충돌, 그리고 불가능만 보인다. 나중에 돌아보면 거기에 도도한 흐름이 있는 거다.”

 - 무엇이 도도한 흐름을 가능하게 하나.

 “인생으로 끌어오면 그게 희망이다. 기차가 6시45분에 도착하기로 돼 있다. 그걸 기다리는 건 희망이 아니다. 그건 오기로 돼 있는 거다. 가만히 있어도 온다. 기다릴 게 뭐 있나. 당장 이 시점에서 아무런 보장이 없는 것. 보장은커녕, 아예 안 올 거라고 보장돼 있는 것. 그걸 기다리는 것이 희망이다.”

 - 희망은 희망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런 희망이 도도한 흐름이 되려면.

 “간절한 의지가 중요하다. 그게 방향을 결정한다. 의지는 우주를 관통하고, 우리 삶을 관통하는 도도한 흐름의 방향타다. 간절한 의지가 있다면 내가 죽은 후에라도 이루어진다. 단 조건이 있다. 도도한 흐름의 관점에서 봤을 때 고약한 게 아니어야 한다. 간절한 대상이 뭔가 가치가 있는 것이어야 한다.”

 홍 원장은 “나는 그걸 뒤늦게 깨달았다. 참 아쉽다. 그래도 그걸 아니까 정말 열심히 살고 싶어지더라. 삶은 정말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했다. 평생 우주를 공부한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무엇이 행복인가.” 그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면 그게 행복이다”고 답했다. 세상의 이치는 그렇게 명료했다.

홍승수 원장의 추천서

천문학자 홍승수 원장은 우주에서 철학을, 그리고 영성을 읽어낸다. 그런 만큼 관심의 폭이 넓다. 칼 세이건의 베스트셀러 『코스모스』를 2004년 번역하기도 했다. 당시 출판사는 그의 번역 승낙을 얻기 위해 5년간 기다렸다고 한다.

 그는 “내가 생각하는 신은 냉랭하다. 거기에 열광은 없다. 삶의 고통이 올 때, 나는 이 고통을 잘 견딜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뿐이다. 우주의 도도한 흐름, 그 선상에서 이게 당신의 뜻이기를 바랄 뿐이다”고 말했다.

◆혼돈의 가장자리(스튜어트 카우프만 지음, 국형태 옮김, 사이언스북스)=생명의 기원, 무질서에서 질서가 창발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신학과 철학을 공부한 친구가 있었다. 신부가 되려다 결국 철학자가 됐다. 그 친구에게 이 책을 주며 “이제 신학을 다시 써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친구의 반응은 없었다. 그런데 저자가 그 다음 책을 냈다. 제목은 『다시 만들어진 신』이었다.

◆다시 만들어진 신(스튜어트 카우프만 지음,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의학과 생물학, 화학과 물리학 등을 공부한 복잡성 과학자 카우프만이 제시하는 새로운 신학이다. 과학에 기반을 둔 세계관을 통해 자연적 신성(神性)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성이 우주의 내재적 속성이며,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노자·노자익 강해(김흥호 지음, 사색출판사)=서울에 있을 때는 이화여대 연경반에서 고(故) 김흥호 목사의 강의를 종종 들었다. 이런 분이 있다는 걸 예순이 넘어서 뒤늦게 알았다. 우리나라 기독교에는 참 답답한 면이 있다. 그걸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홍승수=1944년생. 서울대 천문기상학과 졸업.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 1978~2009년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한국천문학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 국립고흥청소년우주체험센터원장을 맡고 있다. 최근 청소년을 위한 『지구 바깥세상 우주에는』을 번역했다.
 
고흥=백성호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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