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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건은 콤플렉스다

마을지기 2011.09.17 06:40 조회 수 : 5079

슬로건은 콤플렉스다

[중앙일보] 입력 2011년 09월 09일 박경철 시골의사

슬로건(slogan)은 콤플렉스(complex)의 반영이다. 구호는 소비되는 것이고 소비는 결핍에 근거하기 때문인데, 특히 개인의 그것과는 달리 공적·사회적 영역에서 소비되는 구호들은 더더욱 그런 경향이 있다. 즉 어떤 조직이나 단체가 전면에 내거는 새로운 구호는 대개 그 조직이 가진 최대의 약점이고, 새로 부각되는 사회의 어젠다는 그 사회에서 가장 결핍되고 간절한 것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매년 연초마다 지면에 등장하곤 하는 올해의 키워드가 번번이 빗나가는 이유도 설명이 된다. 명망가들에 의해 예측되는 키워드는 그 순간 가장 결핍돼 있는 것보다 그 다음을 예측하려는 태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즉 명망가들이 선정하는 화두는 계몽적 시각에 입각해 있고, 대중의 갈증이 아닌 자신의 갈망이 표현돼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물결에 대한 고민은 통찰적 안목의 관점이 아닌, 이웃의 눈으로 그들의 마음을 읽는 데서 출발하면 정답이 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재작년에 불어닥쳤던 ‘정의’라는 열풍 역시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금융위기를 겪으며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장에 주력한 정책목표는 필연적으로 양극화 문제를 촉발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사회 전반의 갈증과 아쉬움이 광범위하게 확산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정의라는 화두는 정곡을 찌른 것이다.

 사실 정의란 쉽게 소비될 수 없는 내구재에 속하므로 사회적 화두로 등장하기에는 약점이 많은 용어다. 또 정의는 누구나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고, 공적 정의와 사적 정의가 교차하는 현실세계에선 누구도 ‘스스로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에서 자유롭지도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 열풍이 불었다면 갈망의 크기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등장할 화두가 페어(fairness), 즉 공정이었던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모두가 정의를 이야기했지만, 정의란 해소될 수 없는 갈증이고, 사막의 여행자가 소금물을 마시듯 회자될수록 더욱 갈망되는 성질이라면, 다음 수순은 새로운 것이 아닌, 정의의 연장선에서 수단을 고민하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구현되지 않는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탐색이 자연스레 공정이라는 화두를 이끌어낸 셈이다.


 그럼 정의와 공정을 이어받을 다음 화두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위로와 격려일 가능성이 크다.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신자유주의 열풍으로 시작된 양극화의 불균형이 정의를 잉태했고 수단으로선 공정을 찾았지만 그것이 사람의 피가 흐르는 자본주의건, 따뜻한 자본주의건, 혹은 미시적으로 복지와 균형이건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안타까움, 즉 체념이다.

 그래서 아마 올해 말 혹은 내년에 등장할 화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위로, 격려 등의 손 내밀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타인을 위로한다는 것은 진심이 있어야 하고, 위로의 대상을 이해하는 공감이 담겨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일어난 한국 사회의 변화 조짐도 이 맥락에 있다. 우리 사회는 선배 세대들의 헌신을 바탕으로 힘든 시기를 넘어왔고, 이 시대는 대중을 이끌고 ‘나를 따르라(follow me)’를 외치는 리더십이 가장 효율적이었지만, 이제는 그보다 ‘나와 함께(with me)’라고 말하는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기성세대들의 생각과 후배 세대들의 생각이 큰 괴리를 보이는 지점이고, 쉽게 위로가 되지 않는 이유다. 기성세대의 리더십이 이끌고 당기는 계몽주의적 리더십이었다면, 앞으로 필요한 리더십은 밀어주고 어깨를 내어주고,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눈물을 닦아주는 리더십이다.

 그 점에서 한국 사회의 큰 변화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문제여야 하고, 지금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분들이 이 위로와 격려의 키워드만 담아낸다면 뜻밖에 많은 문제가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 해법은 그 안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감성의 문제와 이성의 문제가 충돌할 때 반드시 이성이 정의는 아니다. 그렇다면 지하철에 뛰어들어 타인을 구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의 마음이 감성이듯 감성적인 것이 약하고, 무능하고, 무력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의 변화인 것이다.

박경철 시골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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