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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반갑고 심란한 무상복지

마을지기 2011.01.18 05:54 조회 수 : 9331

 

 경기침체로 혹독한 한파가 몰아쳤던 6년 전 겨울, 독일 뉘른베르크의 고용사무소에 남루한 차림의 여인이 나타났다. 사상 최대를 기록한 500만 명 실업자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총선에서 압승한 기민당 당사에는 이런 현수막이 나부꼈다. “슈뢰더 총리, 지구를 떠나시오.” 그래서인지 슈뢰더는 정계를 떠났고 기민당의 메르켈이 등장했다. 메르켈은 재정적자를 줄이려고 그 여인의 실업급여를 대폭 삭감했다. 700유로(약 110만원)를 받아 든 그녀는 울먹였다. 그전엔 1200유로를 받았다.

 몇 년 전 미국에는 의료보험 없이 위태롭게 살아가는 빈곤층이 4000만 명을 헤아렸다. 연금은 언감생심, 실업수당은 기초생계비의 절반도 안 됐다. 편모 가정에 지급되는 가족지원금을 받으려면 위장이혼이라도 해야 했다. 최강국 미국의 모습이 이랬다. 그래서인지 자유시장론자 저격수로 유명한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의 『진보의 양심』이란 책이 주목을 끌었다. 미국이 진정 제국다운 면모를 갖추려면 사회보험 확대가 급선무라는 것, 그는 뉴딜정신의 완성을 주문했다. 사회보험은 연금, 의료, 실직, 산재보험 같은 기본적 생계안전망이다. 지난해 오바마가 주도한 의료개혁은 그에 대한 작은 답이었다.

 ‘과잉복지’ 독일과 ‘과소복지’ 미국의 개혁정치가 주로 사회보험에 집중되어 있다면, 한국은 무엇을 건드리고 있는가? 자칭 선진국 말고 진정한 품격을 갖추려면 한국은 어떤 복지개혁에 나서야 하는가? 민주당이 야심 차게 빼든 ‘무상복지’는 그 정답인가, 아니면 어렵게 쌓은 우리의 복지제도를 혹시 망가뜨릴 독인가? ‘복지전쟁’을 보면서 국민들이 헷갈리는 질문이다. 이 ‘무상’이란 코드는 분명 내년 초 개막될 대선정국을 달굴 것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복지전쟁에 돌입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한국도 이제 선진국형 정치에 근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민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무상복지 발상에 비판이 쏟아질수록 민주당은 엄청난 반사이익을 누릴 전망이고, 담론이 무성할수록 한국의 복지현실은 조금씩 개선되어 나갈 것이다. 그래서 기대가 된다. 과거 선진국이 그랬다. 좌파의 무리한 확대 주장과 우파의 좀스러운 비용절감 기조가 격렬하게 충돌했는데, 그 결과는 언제나 복지의 점진적 확대로 마감되었다. ‘복지는 좌우 날개로 난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민주화 20년 만에 드디어 복지국가의 자랑인 ‘무상복지’ 개념이 한국에 출현했으니 어찌 반갑지 않을까만, 그것도 잠시, 마음이 심란해진다. 부실한 사회보험을 외면하고 부자 국가들의 쟁점을 끌어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무상복지엔 납세자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유럽의 사민주의 국가들은 ‘평등과 연대’를 내걸고 국민들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했다. 법인세 60%, 소득세 40%에 달하는 세금폭탄을 납세자들은 사회통합을 위해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총 16조원이 소요된다는 민주당의 무상복지안엔 정작 세금 얘기가 빠졌다. 소모성 사업예산을 전용하고 부자감세를 철회하면 충분하다는 논리인데, 한두 번이야 가능하겠지만 계속 버틸 수 있을까 의문이다. 50조원으로 추정되는 실제비용은 도리 없이 납세자의 몫이 될 것이다. 따라서 무상복지안은 ‘세금 50조원 더 내주실래요?’다. 유럽처럼 납세자들이 의기투합해 표를 주면 논란은 끝난다. 그런데 어림잡아 가구당 400만원, 경제활동인구 1인당 250만원씩을 더 내라면, 물러설 사람들이 속출할 것이다.

 사회보험이 부실한 한국에서 ‘무상’은 여전히 성급한 꿈이다. 공짜 밥은 별로 시급하지 않고, 공짜 의료와 보육은 중요하나 더 절박한 문제가 뒤통수를 잡아당긴다. 절대빈곤층 250만 명, 근로빈곤층 410만 명, 저소득층 400만 명, 줄잡아 1000만 명이 가난·질병·실직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 말이다. 인구의 20%, 화려한 성장의 그늘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보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일자리가 변변치 않아 연금은 물론 고용보험, 산재 혜택도 받지 못한다. 국민기본권이 없다. 이들에겐 무상복지보다 사회보험이 더 절실한 것은 물론이다. 1000만 명 빈자(貧者)를 버려두고 부자(富者)에게도 준다는 무상복지로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어쩐지 한심스러워 보인다. 반갑지만 심란한 이유다.

 이런 가운데 무상급식을 주민투표로 결판내야 하는 나라가 지구상에 있을지 모르겠다. 좀 우스꽝스럽다. 차라리 의무교육인 중등교육에 등록금을 없애는 게 순서 아닐까? 1조3000억원 적자에 빠진 건강보험에 무상의료를 무작정 떠넘기는 것은 무모하고, 먹고살기에 지친 하위 소득계층에 대학등록금을 우선 지원하겠다는 발상은 아무래도 생뚱맞다. 미래를 책임질 청년인구의 급감 추세를 생각하면 제일 그럴듯한 게 무상보육이다. 무상복지가 산의 9부 능선에 있는 정책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겨우 3부 능선쯤에서 길을 내고 있는 중이다. 기왕 복지에 달려들었으니 우리의 처지에 맞는 메뉴를 개발해 달라.

송호근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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