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권력 아닌 논리력·설득력 우선인 사회가 건강
설득을 가르치는 나라, 말이 통하는 사회가 돼야
최근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미셸 오바마가 한 연설이 화제가 되고 있다. “저는 매일 아침 노예들에 의해 세워진 집에서 잠을 깹니다. 그리고 제 딸들, 두 명의 아름답고 지적인 흑인 여성들이 백악관의 잔디밭에서 강아지들과 노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녀는 단 두 문장으로 흑인 노예의 역사를 상기시키고 있으며, 인종차별의 부당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그런 노예의 후예가 대통령이 되는 미국의 저력을 자랑하고 있다.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자리가 이런 수사(修辭)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런 감동적인 수사의 이면에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자유로운 토론을 중시하고 설득의 수사학을 연마해 온 교육과 문화의 유구한 전통이 있는 것이다. 수사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그것은 “설득의 가용(可用)한 수단”(아리스토텔레스)이다. 모든 관계에 언어가 개입된다. 생각과 사상과 느낌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언어의 외피를 입을 때 비로소 존재 안으로 들어온다. 막말로 언어 없이 사상도 없으며, 표현할 수 없는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이다.
수사가 빈약하거나 부실한 공동체에서 쓸데없거나 소모적인 분쟁이 일어난다. 얼마 전 정부의 한 고위 관리자가 민중을 “개·돼지”라고 불러서 큰 소요가 일어났다. 최근에는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문제와 관련해 “외부세력”이라는 불분명한 용어가 혼란을 일으킨다. 어떤 사람들은 성주 주민이 아니면 다 외부세력이라고 몰아붙인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놀랍게도 미국을 외부세력이라고 지칭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외부세력의 기준은 공간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외부세력은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세력’을 의미하는가. 그렇지도 않다. 수많은 성주 거주민들이 사드 배치를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넌더리가 나는 “종북”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이 단어는 말 그대로 ‘북한을 추종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수많은 발화자에 의해 이 단어는 자신들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 혹은 세력을 지칭해 왔다. 이 언어의 폭력에 의해 때로 멀쩡한 사람들이 종북이 되고, 이 나라는 각계각층에 북한을 옹호하고 모방하려는 사람들로 ‘득실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언어가 현실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먼저 사물이 있고 그것을 지칭하는 언어가 있다는 구태의연한 언어관을 의심해봐야 한다. 언어는 언어 이전의 사물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거꾸로 현실을 만들기도 한다. 공동체 안에서 어떤 한 구성원이 다른 사람을 지칭한 “저 사람은 너무 이기적이야”라는 말 한마디가 실제(fact)와 무관하게 한 사람을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이것이 언어의 힘이고 수사의 힘이다.
공동체의 모든 관계에 이 언어의 끈들이 개입된다. 언어 없이 관계도 없고 현실도 없다. 그러니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진술하고 설득하는 수사의 힘은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국가 단위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서툴고 악의적인 서사는 공동체의 귀중한 에너지를 쓸데없는 곳에 낭비시킨다. 글쓰기가 아닌 암기 위주의 교육이 수사 부재의 공동체를 만든다. 수사가 빈약하므로 설득의 기술이 부족하고, 설득하지 못하므로 언어 외적인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능사인 사회가 된다.
좋은 수사는 또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평등하고 민주적인 것으로 만든다. 나이나 권력이 아니라 논리력과 합리적 설득력이 우선인 사회는 얼마나 건강한가. 그런 사회에는 논리 정연한 자식의 말을 받아들일 줄 아는 부모가 많으며 학생의 주장에 귀 기울이는 선생들이 넘쳐난다. 그런 사회의 정치는 힘으로 국민들을 몰아붙이지 않는다. ‘말이 되지 않는’ 정책은 이미 옳은 정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득력과 그것에 토대한 사회적 동의를 중시할 때 사회는 비로소 합리·평등·민주의 원칙에 의해 가동된다. 이렇게 ‘계급장’ 뗀 담론의 “공공영역(public sphere)”(하버마스)이 확대될 때 ‘나쁜’ 사상에 대한 공포도 사라진다. 그런 사상은 설득력이 부족하므로 사회적 동의를 이끌어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설득을 가르치는 나라, 말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