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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내일은 어제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중앙일보 | 허태균 | 입력 2016.01.18. 01:10 | 수정 2016.01.18. 07:28
1월 중순쯤이면 모두들 2016년을 위한 새로운 계획을 이미 세웠을 것이다. 책을 몇 권 읽겠다는 사소하고 개인적인 목표, 매출을 높이거나 물가를 잡겠다는 심각하고 거시적 과제들까지. 그런데 흔히 이런 계획들은 지난해를 기준으로 또는 지난해의 실패나 문제를 고치기 위해 세워지기도 한다. ‘지난해에는 책을 7권밖에 못 읽었는데 올해는 꼭…’ ‘지난해 매출 대비 얼마’ ‘지난해에는 부동산 문제가 있었으니 올해는…’ 등의 생각에서 그 계획들이 나온다. 이런 사고는 그 계획들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매우 시의적절하고 당면한 문제를 직접 다루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그 계획의 필요성과 타당성이 자동적으로 부여된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사고는 우리를 결국 초점주의(focalism)에 빠지게 만들고, 드러난 몇 가지 과거의 문제에 우리의 미래를 종속되게 만드는 것이다.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이런 초점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2015년 말 한국의 대학교육을 완전히 혼란의 정점으로 끌고 간 시간강사법이다. 결국(다행히도?) 또다시 유예되기는 했지만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시간강사법은 그 이전부터 문제가 되어 온 대학 시간강사의 처우개선과 신분보장 등의 이슈가 한 시간강사의 자살을 계기로 사회적 이슈화되면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런 비극적 사건 직후에 만들어져 오히려 철저히 초점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한 해에 한두 과목 강의만 하면서 최저생계비에 턱도 없는 수입으로 살아야 하고, 한 학기 단위로 강의가 결정되어 삶이 불안하고, 학교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공정한 공개채용 방식, 한 학기 9시간 이상, 1년 단위 계약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시간강사법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어찌 보면 과거의 문제들을 꼭꼭 집어서 해결하는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해결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부 인기 있는 전공들을 제외하고는 개설과목에 비해 시간강사를 하고 싶어 하는 고학력 실업자의 수가 너무나도 많다는 더 현실적이고 중요한 본질을 완전히 무시했다. 현재 많은 경우 소수의 과목을 제자나 주변의 강사들에게 나누어, 심지어 학기별로 돌아가면서 주고 있다. 그 한 과목이 부족하다는 걸 알지만 누구 한 명에게 몰아서 주기엔 오히려 주변에 너무 딱한 강사가 많다. 그런데 이 법이 시행되면 대학이 구조조정이라는 꼼수를 안 부리고 지금 강사들이 맡는 과목을 그대로 유지해도, 단순히 산술적으로 1년에 3학점짜리 한 과목을 나누어 강의하던 6명의 강사 중 한 명이 그 6개 강의를 독식하게 된다. 그럼 나머지 5명은 어떻게 될까? 소수에게 몰아주고 나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은 더 열악한 상황에 빠지는 모순은 어쩔 건가. 아마 이 법이 시행되고 나면 시간강사의 처우가 개선된 듯한 착시 자료도 만들어질 것이다. 시간강사를 하는 소수만을 대상으로 한 자료가 될 테니.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시간강사마저 공개채용 방식으로 만들면 국내 대학 출신 석·박사들은 어떻게 될까? 한국 대학교육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스스로 배출해낸 석·박사 출신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최근 대학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영어강의 능력, 해외활동과 논문 실적을 강화하면서 국내 석·박사들이 설 자리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국내 석·박사들은 전임교원이 되기도 힘들고, 상대적으로 상당한 시간을 시간강사로 보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제 그 시간강사 자리도 전임교원과 같은 매력적인 자리로 만들어 놓고 전임교원 채용과 같은 절차로 해외 석·박사 출신들과 경쟁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학과 학과의 평가에 그 시간강사들의 업적도 포함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은가?
이런 법안이나 정책들은 결코 사태를 더 악화시키려고 일부러 만들었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과거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었다. 하지만 딱 그 문제만 보고 만들었다. 이게 바로 초점주의다. 수많은 관련된 사항을 다 무시하고, 한두 정보에만 집중해 사고하고 판단하는 비극적 현상이다. 강사 문제를 포함한 한국의 대학교육을 궁극적으로 어떻게 만들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그 정책과 법안이 가져올 미래를 상상(simulation)해 보지 않은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기 위해 과거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필수적이다. 하지만 과거는 미래에 대한 고민의 시작일 뿐이다. 원하는 더 나은 미래의 모습을 상상해 보고 그 모습을 달성하기 위한 하루, 한 달, 한 해를 살다 보면 과거의 문제가 해결되어 있는 것이지 과거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꼭 미래가 밝아지지 않는다. 새해의 계획을 다시 들여다보자. 혹시 어제를 위해 내일을 살겠다고 하고 있지 않은지.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