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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법대·의대 타령인가 … 획일성이 우리를 죽인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3.12.25 07:08 / 수정 2013.12.25 07:09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17)·끝 과학철학의 통찰 -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는 “나무만 봐선 안 된다. 이 나무가 무슨 역할을 하나, 다른 나무와 어떻게 연관돼 있나, 숲에서 이 나무의 역할은 뭔가. 베어버려도 되나 안 되나 알아야 한다. 또 숲만 봐도 안 된다. 그럼 큰 그림만 그리지, 작은 그림은 그리지 못하게 된다. 나무도 보고, 숲도 봐야 한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영국에서 잠시 귀국한 케임브리지대 장하석(46) 석좌교수를 지난 16일 만났다. 그는 세계 과학철학계에서 주목받는 석학이다. 2006년에는 ‘과학철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러커토시상을 수상했다. 온도계라는 작은 물건에 집중해 과학발전의 안팎을 방대하게 훑은 신간 『온도계의 철학』(동아시아)은 중앙일보가 뽑은 ‘2013 올해의 좋은 책 10’에 뽑히기도 했다.

 그는 런던대 교수를 거쳐 젊은 나이에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가 됐다. 손에 잡히는 과학, 손에 잡히지 않는 철학. 그는 둘을 관통하는 과학철학을 연구했다. 손에 잡힐 듯 말 듯, 어쩌면 행복의 속성도 그렇다. 인터뷰 내내 그는 깊이 생각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가 보는 행복은 어떤 걸까.

 -언제부터 과학에 관심이 있었나.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커서 뭐 될래’라고 물어보면 ‘과학자’라고 대답했다. 그냥 뭔가를 들여다보고 ‘이게 어떻게 생겼지’ 관찰하고,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지’ 생각하는 게 좋았다. 중학교 3학년 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원서로 읽었다. 영어가 어려워서 처음에는 한 페이지 읽는데 하루가 걸렸다. 그걸 읽고 내 인생이 바뀌었다. 그때 이론물리학을 하겠다고 크게 마음을 먹었다.”

 장 교수는 미국의 명문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학생 시절 종종 교수들에게 난감한 물음을 던졌다. 가령 “빅뱅으로 인해 시간과 공간이 생겨났다. 그럼 빅뱅 이전에는 뭐가 있었나” 하는 식이었다. 그의 질문은 뿌리를 향했다. 교수들은 “야, 숙제나 해라. 문제 푸는 것 좀 더 배우고”라며 “그건 철학의 문제다”고 대답했다.

 -교수들의 대답은 왜 그랬나.

 “유명한 과학자 토마스 쿤(1922~96)이 말했다. 과학은 그렇게 심오하고 답이 안 나오는 문제들을 접어놓고 나서야 생기는 거라고. 왜냐면 과학은 풀 수 있는 문제를 얘기한다. 가능한 탐구를 하는 거다. 답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문제는 철학에 맡겨 둔다. 그래서 학부생 때 ‘너는 왜 철학적인 얘기만 하려고 하느냐’는 꾸중을 자주 들었다.”

 그런 꾸중을 듣다가 드디어 그는 화가 났다. “그럼 난 철학을 하겠다. 내가 궁금한 게 다 철학적인 얘기라면 나는 철학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래서 보니까 과학 철학이란 분야가 있더라. 난 그걸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뿌리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과학의 바탕이 왜 궁금했나.

 “바탕을 알아야만 과학이 진짜로 잘 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게 확실히 맞는지는 모르겠다. 인간이 과연 전체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건 어쩌면 종교적 열망일지도 모른다. 뉴튼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선언했다. 중력 법칙은 온 우주에 적용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태양계 안에서만 증거를 모았을 뿐이다. 아인슈타인도 가장 훌륭한 하나의 이론을 세워서 모든 자연 현상을 설명하려 했다. 현대과학을 보면 그런 꿈들이 많이 깨져나갔다. 요즘은 ‘우리가 연구할 수 있는 범위에서 잘하자’는 추세다. 노벨상 수상자를 봐도 거대한 이론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한계를 느끼는 거다.”

 장 교수는 “과학과 철학의 경계는 결국 인간이 짓는다”고 말했다. 이건 절대적으로 과학적이야, 이건 절대적으로 철학적이야. 그런 건 없다고 했다.

 “철학적 문제를 연구하다가 ‘아, 이렇게 하면 풀리겠네’하고 방법을 찾으면 과학적으로 정의가 되는 거다. 과학과 철학의 경계선은 딱 정해진 게 아니라 계속 바뀐다.” 가령 ‘생물학(Biology)’이란 용어는 19세기에 생겨났다. 그 전까지 생물학의 영역은 철학이나 종교에서 다루었다.

 -과학을 하다가 철학으로 옮겼다. 결국 과학철학을 했다. 어땠나.

 “좋았다. 이건 행복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야구에 비유하면 과학에선 공을 늘 이쪽으로만 던져야 했고, 왼손으로 던지면 안 되고 그랬다. 철학에선 알고 싶은 걸 다 질문해도 괜찮았다. 던지고 싶은 공을 마음껏 던질 수 있었다. 정말 좋았다.”

 -철학에는 울타리가 없기 때문인가.

 “그렇다. 그런데 철학도 1년간 해보니 울타리가 있더라. 전문적 학문이 되면서 틀이 생긴 거다. 학문은 다 그런 경계가 있다. 그런데 철학만은 너무 그래선 안 된다고 본다. 철학은 쓰레기통이어야 한다.”

 -쓰레기통, 무슨 뜻인가.

 “다른 학문에서 대답할 수 없는 것. 그래서 던져버린 것. 그걸 철학이 담아야 한다. 모든 질문을 포용하고, 수용하는 쓰레기통 말이다.”

 -과학과 철학, 양쪽을 아우르는 과학철학의 역할은 뭔가.

 “과학을 하다 보면 좁게 들어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시야가 좁아진다. 이들에게 과학철학은 시야를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나무도 보고, 숲도 보는 건가.

 “그게 희망사항이다. 과학적 지식 자체도 완벽한 게 아니다. 과학지식도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일상 생활의 지식에서 시작된다. 그걸 자꾸 정제해서 발전시킨 거다. 과학철학이 행복에 대해서 던질 수 있는 메시지는 ‘열려있음’이다. 과학철학에서도 나는 다원주의를 주장한다.”

 장 교수는 영국에서 살고 있다. 가끔 한국을 찾을 때마다 놀랍다고 했다. “달라지고, 발전하고, 교양도 높아지고, 정말 잘 살게 됐다. 그런데 사람들이 불행해 보인다. 이상하게도 아주 획일적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획일성이다. 사람들이 너무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

 -같은 목표라면.

 “전부 의대 가야하고, 전부 법대 가야하고. 내게 30년 전에 한국의 미래를 추측해 보라고 했다면, 이런 게 점점 없어질 거라고 말했을 거다. 그런데 도리어 심해지고 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봤다. 첫째는 상상력이 부족하고, 둘째는 서로 가만 놔두질 않는다.”

 장 교수는 스마트폰을 예로 들었다. “사람들이 혼자 있는 시간이 없다. 늘 스마트폰을 켜놓고 어딘가에 연결되거나 메시지를 주고 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트렌드가 엄청난 속도로 퍼진다. 늘 남들의 시선에 노출돼 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거나 커피숍에서 누구를 기다리며 혼자 있는 시간, 다시 말해 혼자 생각할 시간이 없다. 그때도 스마트폰을 두드린다. 그런데 어떻게 개성이 살겠는가. 개성이 살아나고, 개성이 만들어질 시간 자체가 없다.”

 과학자답게 그는 진화론에 빗댔다. 다윈이 갈라파고스 제도에 갔더니 격리된 섬마다 같은 종이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격리가 돼야 좀 다른 방향으로 진화한다. 그 중 잘된 것이 선택을 받고 또 진화한다.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도 그게 좋다. 우리에게는 일상의 유배, 자발적 유배가 필요하다.”

 -어떡하면 우리가 다양성을 좀 키워볼 수 있겠나.

 “서로 좀 놓아줘야 한다.”

 -왜 놓아주질 못하나.

 “불안 때문이다. 우리 부모 세대만 봐도 굉장한 혼란과 공포 속에서 사셨다. 그런 불안이 아주 뼈에 박히신 분들이다. 조금만 잘못하면 우리 자식이 큰일나지 않을까, 염려하며 길렀다. 그게 대를 물려서 내려가는 것 같다. 솔직히 요즘 재능 있는 얘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 한다고 해서 밥을 못 먹겠나, 굶어 죽겠나.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불안의 심리를 서로 물고, 또 물리고 있다. 상상력이 부족하니까 불안이 가중된다.”

 -과학을 하다가 철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그때 불안하지 않았나.

 “불안했다. 그런 불안을 피하려고 하면 곤란하다. 품고 가면 된다. 내가 궁금한 것, 내가 알고 싶은 걸 찾아가는 거니까. 우리 조상이 말했지 않나.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나. 구더기의 불안을 품고 가면 된다.”

 -거기에 행복이 있나.

 “호기심 없이 사는 게 오히려 불행하지 않나. 호기심이 없으면 남이 정해준 기준을 따라가야 한다. 자신이 정했다고 해도 메마른 목표를 따라간다. 그게 정말 행복한 삶일까.”

글=백성호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장하석 교수의 추천서

장하석 교수는 책을 선택하는 데도 생각이 많은 듯했다. 인터뷰를 한 뒤 며칠이 지나서 ‘추천할 책 세 권 고르는 게 용이한 일은 아니군요. 이제야 정했습니다’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다음은 과학과 철학의 경계에서 양쪽을 들여다보며 그가 고른 책들이다.

◆코스모스(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중학교 3학년 때 읽었던 이 책은 나의 인생을 바꾸었다. 단순한 대중과학 서적이 아니다. 현대과학의 내용을 흥미진진하게 설명할 뿐 아니라 과학의 문화적·정치적 의미를 가르쳐 주는 무게 있는 작품이다. 나온 지 30년이 넘었지만 이 책이 주는 과학적·철학적·사회적 메시지의 본론은 아직 생생하다.

◆과학혁명의 구조(토마스 쿤 지음, 김명자·홍성욱 옮김, 까치)=지난해 출간 50년을 맞은 이 책은 과학사와 과학철학 분야에서 고전으로 굳어졌다. 지금은 일반인에게도 친숙해진 ‘패러다임(paradigm)’이란 말을 유행시킨 책이다. 저자 토마스 쿤(1922~96)의 박학다식과 독특한 스타일 때문에 두 번, 세 번 읽어봐도 다시 깨닫는 게 있다. 말 그대로 역작이다.

◆살아는 있는 것이오(안승준 지음, 삶과꿈)= 내 ‘분신’이었던 절친한 친구 안승준의 유고집이다. 스물다섯 때 사고로 요절한 후, 일기·편지·시·에세이 등 그가 남긴 글들을 엮어서 냈다. 저자는 어떤 유명한 작가보다도 더 깊은 고민과 통찰력으로 인생과 사회와 예술에 대해 이야기했고, 거침없는 비판 정신으로 남과 자신을 모두 채찍질했다. 그런 귀중한 생각들이 이 책에 주옥처럼 박혀 있다. 20여 년 전에 출간됐지만 지금 우리를 비추는 데 모자람이 없다. 현재 절판 상태인 게 마냥 아쉽기만 하다.

◆장하석 교수=1967년 서울생.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에서 학사, 스탠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박사 후 과정을 거쳐 20대 후반에 영국 런던대 과학철학과 교수가 됐다. 현재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로 과학사·과학철학을 강의한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경제학부 교수의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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